1979년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도래한 유신체제의 종언 및 서울의 봄은 너무도 짧고도 허망하게 신군부의 구테타 음모와 정권장악으로 다시 길고 긴 군부철권시대로 접어들어야만 했다. 그 사이에 학생들의 총궐기와 광주항쟁이 처절하게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간절한 민중적인 민주주의와 자유에의 갈망을 분쇄하고 탄압하면서 박정희에 이은 전두환의 군부독재의 길고 긴 통치가 어둡게 1987년에 이르도록 점철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총격에 의한 10·26 사건으로 새로 등장한 이른바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하였다. 이를 12·12 쿠데타라 부르며 이로써 박정희의 독재와 통치를 계승한 신군부 세력은 온 나라의 들불같은 민주화의 열망과 여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이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유신헌법 개헌을 진행하는 국회를 탄압하고 저들의 군부에 의한 집권을 획책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실세인 전두환이 사령관인 보안사령부는 보도 검열을 강화하고 K-공작계획 등의 언론 공작을 하면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에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면서 명실공히 막강한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1980년 5월 초부터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보안사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기획하였다. 드디어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을 발표하여 정치활동 금지·보도 검열 강화·대학교 휴교령·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제 조치를 내렸다. 동시에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600여명을 불법 연행, 구금, 수감하고 군병력을 동원하여 국회를 폐쇄하였다. 신군부는 이와 같은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저들의 5.17 구데타에 항거한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무도하게 유혈과 학살로 진압하였다.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민주주의를 탄압하였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5월 30일 이른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공직자 숙청·언론 강제 통폐합' 등으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10월, 7년 단임의 대통령을 유신헌법과 유사하게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전두환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1년에 제12대 대통령직에 취임식을 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열망하던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다시 좌절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 복지 사회 건설' 등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언론통폐합을 통한 악랄한 언론 탄압, 녹화사업 등 민주화 운동 탄압, 삼청 교육대 등으로 민주화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대표적 민주지도자인 김대중을 사형시키려하였고 재야 민주화인사들과 학생들을 국군형무소인 남한산성 등과 형무소에 유폐시키면서 인권을 철저히 유린하였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군부는 기습적인 계엄령 전국 확대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 계엄철폐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중 광주에서 처절한 5.18항쟁이 일어났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김대중의 석방을 외치던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무자비한 진압을 당하자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한 것이었다. 이때 군은 광주를 포위하고 광주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학살과 강경진압을 가했다. 이때에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절규도 광주에서 터져나왔다. 이 비극적인 광주항쟁은 우리사회에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겼고 이 사건이 남긴 분노와 충격은 시간이 갈수록 결국 국민들로 하여금 결국은 전두환 독재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1980년대는 그로 인해 5, 6,70년대에 비해 훨씬 더 격렬한 민주화 항쟁을 경험했다. 특히 학생운동은 사회주의와 재야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이같은 추이와 흐름 속에서 1983년에 결성된 ‘민주화운동을 위한 청년연합’의 김근태를 중심으로한 민주화 투쟁과 문익환목사를 비롯한 재야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로 인한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김근태와 민청년간부들에 대한 고문이 1985년에 악명높은 남영동 치안본부대공분실에서 자행되었다. 그리고 결국 재야운동과 결합된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과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 1986년 10.28 건대 항쟁이며 이는 대학생들이 대규모로 건국대 캠퍼스에 집결해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친 사건이었다. 정부는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사상 최고의 수치라는 초강경 진압으로 1520명 체포에 1290명 구속으로 이 사건을 끝냈으나, 그러나 이 사건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학생, 노동자, 시민 항쟁이 87년 6월까지 계속되면서 마침내 전두환의 군부독재정권은 국민의 열화와 같은 민주화의 열망 앞에 무릎을 꿇고 종식되기에 이른다.

 

1987년 6월에는 온 나라를 격분으로 일어서게 만든 1985년의 김근태와 민청년 간부들에 대한 남영동대공분실에서의 고문에 이어서 같은 곳에서의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김영삼 김대중의 신당 창당을 정부와 어용 야당의 지원을 받은 깡패들이 방해한 이른바 용팔이 사건, 4.13 호헌조치,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사망 등으로 인해 시민들의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불만이 노도처럼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가 바로 1987년 6월 항쟁과 승리였다.

 

6.10항쟁으로도 불리우는 이 민주화의 승리의 분수령은 원래는 이 날에 전두환의 뒤를 이은 군사반란의 또 다른 주역인 노태우가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날이었으며 당연히 집권세력은 1980년 저들 군부가 만든 헌법에 따라서 체육관에서의 간접선거로 다시 노태우를 전두환에 이은 새 대통령으로 뽑으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며 40년의 반민주 독재정치를 청산하고자 이는 전국적으로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신분과 계층과 계급을 구분하지 않고 일어섰다. 민주진영은 87년 5월에 야당을 포함한 최대의 민주화운동을 위한 연합전선인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 살인 은폐 조작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거행되었다.

 

국민운동본부의 간부들이 집결하여 있던 광화문의 성공회 대성당의 우렁찬 타종에 이어서 전국의 성당 교회의 자유의 종의 타종이 이루어지고 아울러 택시운전사들의 경적과 함께 온 국민들이 떨치고 일어나서 박종철군의 사망을 추모하며 고문살인을 자행한 정권의 퇴진과 규탄과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을 외치면서 분노한 다수 시민들, 이른바 넥타이 부대들도 모두들 이 광장과 거리에 나와 4.13 호헌조치를 철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마침내 민주화의 대분수령의 승리로 만든 사건이 위대한 6월항쟁이었다. 이로서 결국 노태우에 의한 사실상 국민의 뜻에 따르는 항복을 내용으로 한 6.29 선언이 발표되면서 한국은 마침내 실질적인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마침내 형식적 민주화의 승리의 새로운 역사에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원래는 이 과정에서 1987년에 전두환 정부는 4·13 호헌 조치를 통하여 다음 대통령 선거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당연히 대통령 선거가 간선제였기 때문에 온전한 민주화하고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민들의 민심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사망 등으로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거대한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결국 당시 여권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이와 같은 피할 수 없는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5년 단임에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제5공화국과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승리와 함께 독재정권이 형식적으로나마 시민들에게 항복하자 시민들의 요구는 폭포처럼 분출했다. 특히 오랜 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요구가 물밀듯이 터졌다. 그 결과가 87년 노동자 대투쟁인 바,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이 사건은 노동자들이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자신들의 사회권적 기본권을 보장받게 된 사건이었다. 사실적으로 본다면 87년 6월 항쟁 자체는 일견 국민들의 민주화의 승리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독재정권의 기만극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뒤이은 노동자대투쟁은 민중의 실체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크게 보장받게 했다는 점에서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거둔 의미있는 진일보한 성공이었다.

 

1987년 유월항쟁으로 인한 민주화의 승리는 단순한 박정희에 이은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군부독재의 시대를 실질적으로 마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승만에 의해 자행된 독재와 반민주주의의 40년 역사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한국민중의 자유와 민권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1897년의 호남에서 활화산으로 터져나온 동학농민혁명의 제폭구민과 광제창생 인내천의 위대한 깃발과 함성의 면면한 민중적 의지의 승리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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