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시골 경제가 괜찮았다. 장사들도 외상을 놓고 갔다가 봄 · 가을에 보리와 나락으로 가져갔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00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영화홍보의 가설극장은 며칠씩이나 열려 아이들의 가슴은 밤마다 통개통개했다. 심지어 쇼단이나 약장사들의 큰 공연인 악극이 시골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이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피는 것도 필요한 작은 역사이다.
  시골 경제의 중심이었던 양조장과 방앗간이 면소재지에서 사라졌다. 한두 개 있었던 양조장은 주막이나 동네 점빵들이 문을 닫으면서 목숨을 다했다. 대형화에 밀려 소규모 방앗간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나 더 들자면, 자전차포다. 제대로 된 교통수단이 없고 보니 옹색한 시골길에는 자전거가 제격이었다. 자전차(自轉車)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라는 의미로, 지금은 자전거라는 말을 쓰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여전히 자전차라고 부른다. 농촌의 청소년들은 통학에 자전거를 많이 이용했는데, 자전거 살 돈이 없어 먼 거리를 걸어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현대사 증언을 들으려고 돌아다니다가 곰소에서 자전차포를 했다는 남궁정길(南宮正吉)씨를 만났다. 1938년생이니 집 나이로 81세지만 얘기를 조리 있게 잘 하시고 기억력도 좋으시다. 그의 가족들은 본래 고부면 종암 마을에서 살다가 1938년에 아버지의 4형제가 진서면의 연동으로 이사를 했다. 곰소 바다를 막는데 노동 인력이 필요하니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사를 한 것이다. 조부모님과 결혼한 작은 아버지를 포함하여 12명의 대식구가 한 집에서 살았다.
  곰소의 곰섬과 범섬을 연결하는 공사는 연동에서 막기 시작하여 범섬으로 이어지고 반대편에서는 작도에서 시작하여 곰섬으로 연결하는 물막이 공사였다. 공사가 끝나자 면의 중심지는 연동이나 진서에서 곰소 쪽으로 옮겨갔다. 정길은 군에서 제대한 후 에 곰소 자전차포를 인수해서 별다른 기술도 없이 25세 때  ‘남신(南信) 자전차포’를 열었다. 기술자를 데려다가 그 밑에서 2년간 일을 배웠다. 자전거를 고치기도 하고 조립하여 팔기도 했다. 주 고객은 학생들이 많았고 자전거뿐만 아니라 니어카도 취급했다. 보안면의 만화동이나 신복리와 진서 끝인 마동에서도 자전거를 끌고 이곳까지 수선하러 왔다.  
  나중에는 동아일보 신문지국도 겸하여 신문을 배달했다. 당시만 해도 라디오나 TV가 흔치 않던 때라서 신문에서 정보를 얻어야 했다. 신문지국도 15년 정도를 하니 TV가 많이 보급되면서 신문 독자가 줄어들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남궁정길은, “진서면에서 나 몰르면 간첩일 것이여. 내가 오토바이 타고 맨 날 동네를 돔서 신문을 배달 했은게”. 자전차포는 40년을 한 후인 2,000년대 초에 가게 문을 닫았다. 그 뒤에는 자전차포 자리에 대양슈퍼를 열어 식료와 잡화를 팔았다.
  한국전쟁 기에 연동 옆 동네인 진동과 진서에서는 똘망똘망한 젊은이들이 산으로 들어가서 많이 죽었다. 정길의 가족들도 아버지의 4형제가 야지(野地)인 백산면의 덕신리로 피난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에는 3년간 흉년이 들어 초근목피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들을 얘기하면서, ‘전쟁은 절대 와서는 안 된다’고 손을 내젓는다. 나라의 평화가 지역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며 현재 진행 중인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에도 관심이 컸다.
  곰소는 갯벌 매립의 역사였다. 바다에 끈을 대고 살면서 바다를 없애는 모순의 연속인 셈이었다. 이제는 난개발을 막고 역사와 문화의 경험을 지역의 장래에 접목해야 할 시점이다. 곰소를 지나는 관광객들을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가지고 만날지를 고민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무엇인지를 서로 묻고 답해야 할 길에 곰소는 서 있다.

정재철 (사)부안이야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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