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은 1994년에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에서 하서의 구암리 고인돌을 언급하며 무한한 애정을 드러냈다.

15년 전, 나는 처음 구암리 고인돌 집에 와본 다음 해마다 답사길에 여기에 들렀다. 봄꽃이 피어날 때면 매화와 벚꽃이 아름다웠고, 여름엔 녹음 속에 피어난 채송화, 복숭아가 순정을 다하고, 가을엔 떨어진 은행잎이 고인돌을 뒤덮으며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겨울날 눈에 덮인 고인돌이 호랑가시나무의 윤기 나는 이파리와 빨간 열매와 어울리는 것이 어찌나 곱고 예뻤는지 모른다.

유홍준은 고인돌이 있는 구암리 마을이 앞으로 부안의 명소, 대한의 명소로 크게 부상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은 훗날에 여기에 고인돌 찻집을 내어 변산에 이르는 초입의 명소로 만들고 싶다는 뜻도 드러냈다. 서해안이 개발에 몸살을 더해갈수록 고인돌이 지닌 문화적 가치와 생명력은 더해갈 것이니, 나라의 문화재 보호능력에 기대하기는 어렵고 민(民)이 아니고서는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호소도 했다. 한 때 유홍준의 답사기 책을 들고 전국의 문화재를 찾던 때가 있었다. 구암리 고인돌에도 많은 이들의 발길이 찾아들었다. 이 곳에 와본 사람이라면 저자의 말에 공감하여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실 생각을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지난 5월 10일에 지역 초등 3학년 교사들이랑 구암리 고인돌을 찾았다. 『우리고장 부안』이라는 사회과 교과서 연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었다. ‘이 젊은 교사들이 이곳을 보면 작은 탄성을 지를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봄에 이렇게 쓸쓸하고 삭막한 고인돌을 만나다니, 할 말을 잃었다. 돈을 들여 가꾼 흔적은 역력한데 고인돌이 가지고 있었던 넉넉함이나 상상력은 찾기는 힘들었다. 신발에 흙이라도 묻을까봐서인지 시멘트로 정갈하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생뚱맞은 길을 만난 것이다. 필자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고인돌이 개인 집 울안에 있었고 나무들은 무질서하게 자랐지만 소박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인돌은 마을과 어울리지 못하고 관리를 위해 과한 친절을 깔아놓았다.
  이곳 주변은 돌 마을로 이루어졌다. 석상(石上), 석하(石下), 구암(九岩), 반암(半岩) 마을 등은 돌과 관련되어 있다. 마을 뒤에 있는 산에서 고인돌을 떼어내던 채석장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곳의 마을들을 거쳐 채석장까지 고인돌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전국에서도 빠지지 않는 상상의 길이 될 것이다. 문화재의 코앞까지 차를 타고 갈 필요는 없다. 기대와 상상력을 서로 나누며 조금 걸으면 어떠랴. 또한 시멘트를 깔아 삭막하게 만들기 보다는 흙도 밟아보고 주변에 각양 나무와 들풀이 자라면 어쩌랴. 풀 속에는 들꽃도 있으려니.
  위의 사진은 1983년 5월에 찍은 고인돌 사진이다. 이때 고인돌은 비록 철망에 갇혀 있었지만 감나무와 동무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허물없이 우리를 맞았다. 함께 간 아이들은 정신없이 고인돌 사이를 땀나게 뛰어다녔다. 해질녘 어둑해서야 추억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4년마다 이루어지는 지자체 선거에서 후보들의 뜬구름 잡는 듯한 삭막하고 막연한 개발 공약보다는 지역 문화와 역사에 생기를 불어 넣는 애정 어린 관심을 기대한다. 지역 문화를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전문가와 시민들로 구성된 위원회 하나 정도는 부안 지자체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5년 후 10년 후의 지역 역사문화의 방향을 계획하고, 마구잡이 개발이나 문화재 파괴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기능도 필요하다. 부안의 경쟁력은 보여주기 식의 치적 쌓기 사업이 아니라,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갈무리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정재철 (사)부안이야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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