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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32-1970년대의 민주장정 -유신독재와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항쟁
광주항쟁의 민주의 아고라 도청앞 분수대 광장.

1970년대는 한국사회의 격동의 시기였다. 이 70년대의 상징과도 같은 한국의 예수라고도 불러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우리 사회에 깊은 충격을 던졌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속에 분신으로 죽어간 사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었다. 그는 인간이하의 하루 평균 14-15시간을 노동하면서 한 달에 28일을 근무하던 살인적인 노동조건 속의 노동자의 삶의 최소한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바보회“를 만들고 싸우다가 죽어간 것이었다. 전태일의 죽음과 파장은 이후에 우리사회의 진정한 민주화와 노동자의 권리를 포함한 인간화의 모든 투쟁에 커다란 상징과 견인차가 되었다.

70년대 한국은 대통령을 99.9%찬성으로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고,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유정회라는 교섭단체로 임명하는 나라가 됐다. 대통령 말 한마디가 그대로 법이 되고, 헌법도 정지되고, 국민들은 유신헌법을 논하기만 해도 감옥에 갇히는 그야말로 눈과 귀가 가리워진 시대가 바로 유신 1인 통치시대였다. 이것을 유지했던 무기는 바로 긴급조치였다. 과거 이승만은 명색이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은 유지한 채로 독재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그로 인하여 성립된 정권은 철저하게 최소한도의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나 형식도 모두 짓밟은 것이었다.
그 결과로 1973년 2월 27일의 제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에 대한 탄압과 사전 선거, 무더기 투표 등의 선거부정으로 여당인 공화당과 준여당인   유신정우회도 73명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는 절대권력을 위하여 강력한 그의 라이벌인 김대중을 1973년 8월 8일 대낮에 일본의 도쿄 호텔에서 납치하고 수장시키려 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죽이지 못하고 김대중은 8월 13일에 서울에 귀환했다. 이 천인공노할 납치사건이 반유신 운동과 시위에 불을 붙여서 각종 사건과 시위가 연이어 터져나왔으며 드디어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의 시위를 도화선으로 시위와 학생운동이 격화되었다. 또한 개신교의 원로인 김재준과 천관우 등 15인의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의 회복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기에 장준하 백기완 등이 주도한 100만인헌법개정 청원운동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반유신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여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영장없이 구속하고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강력한 철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본보기로 장준하와 백기완이 긴급조치 1호로 15년 징역형을 받았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데모 주동자에게는 사형을 선고할 수 있고 대학을 폐교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이는 당시에 전국적인 학생운동이 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이름으로 약칭 민청학련으로 조직되고 강력한 시위와 투쟁계획에 맞선 정부의 강력한 대응이었다. 결과적으로 1.000명 이상의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구속되고 205명이 기소되는 중에 전 대통령 윤보선과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여기에 인민혁명당 약칭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7명의 피고들이 비극적인 사형집행을 당하고 민청학련 관계 피고들도 사형과 무기, 20년의 징역형 등을 무더기로 선고받았다.

그러나 9월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족되고 11월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조직되고 기자들도 언론자유수호 투쟁을 벌렸다. 정보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가 광고를 싣지 못하게 되자 국민들이 작은 광고를 동아일보에 성원하는 사태도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같이 거센 민주화 투쟁에 반동적 복고주의를 내세워 충효사상과 경로사상을 고취하고 유신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위하여 정신문화원도 만들었다. 그러나 1977년 하반기부터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이 다시 살아났으며 1978년 2월에는 제2의 3.1구국선언이 발표되고 1979년 3월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반유신투쟁과 운동은 학생들이 주축이었지만 종교계 즉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과 개신교의 KNCC와 성직자들과 조선동아투위의 기자들도 재야의 장준하, 윤보선, 김대중 등의 정치인들과 더불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민주화의 깃발과 더불어 1970년대 후반에는 노동투쟁과 농민투쟁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도시빈민의 문제도 크게 부각되고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독재에 맞서 한국의 만델라로

민중의 고난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1979년 5월에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다시 신민당 총재로 당선된 것을 계기로 하여 파국으로 치달았다. 김영삼은 독재정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면서 6월에 유신헌법 폐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통일을 위해서는 김일성도 만날 수 있다고 과감하게 발언했다. 이에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반국가적 행위로 규탄하고 전면철회를 요구했다. 특히 경찰이 탄압을 당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강제해산하면서 박정권과 김영삼의 신민당과의 대립을 극도로 악화시켰는데, 이들이 8월 9일에 신민당사에 찾아와 농성을 하자 김영삼은 이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마침내 경찰이 11일 심야에 신민당사에 난입해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하면서 한명의 여성노동자가 숨졌고 신민당 의원들이 중경상을 입으면서 의원들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박정희는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여 총재직에서 쫒겨나고야 말았다. 그러나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변칙적으로 가결처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의원들은 다수가 새로운 총재 권한대행으로 된 정운갑에게 줄을 서지 않고 김영삼과 함께 싸우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조종은 4.19혁명을 불렀던 항구도시 부산과 마산에서 다시 울렸다. 10월 18일의 부산대학생 시위에 시민들이 적극 합세하여 부산이 한 때 무정부 상태가 되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어서 마산에서도 시위가 일고 커져서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드디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길고 긴 박정희 독재의 종언을 만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이 사태를 맞아 초강경진압을 주장하던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과는 그 대책과 뜻이 달랐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거사를 일으켜 10월 26일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가 연예계 여성들과 추한 주연을 벌릴 때에 마침내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고 박정희와 차지철이 쓰러져 죽음과 함께 이로서 유신체제가 극적으로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18년간이나 권좌를 누리며 독재를 자행하던 박정희시대가 허망하게 가장 신뢰했던 심복부하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끝난 것이었다.

서울의 봄 학생시위.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다시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신군부가 서울의 봄이 도래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열화같은 민주화의 열망을 초토화시키면서 저들의 궁정구테타의 연장으로 오공시대를 열었다. 모처럼 도래한 서울의 봄에서 야당 지도자들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합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분열하였으며 학생운동도 신군부의 음모와 권력쟁탈 의지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5.17 군부구테타가 성공하고야 말았다. 5월 13일과 14일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나서서 전국적으로 6만여 명이 시위를 벌렸고 다음 날 시위는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계험해제와 조기 개헌을 요구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전국총학생회장단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시위를 일시 중단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5월 17일 계엄사령부는 김종필과 이후락 등은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과 문익환 고은을 위시한 다수 민주인사들이 소요 조종혐의로 연행, 체포되었고 이들은 길고 긴 유폐의 시간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서울의 봄을 압살한 신군부의 구테타였다.

그러나 이 군부구테타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남녁 광주에서 일어났다. 구테타와 휴교령에 반발한 전남대학생들이 5월18일 교문 앞에서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리면서 시위가 확산되고 드디어 5월 19일에는 금남로 일대에서 분노한 시민 학생 5.000명이 각목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원들과 싸웠다. 오후 2시에 시위군중이 2만명으로 늘어났고 4시 30분경에는 장갑차에서 쏜 총알로 고교생이 쓰러졌다. 20일에 공수대원들이 3.400명으로 증가되고 이날 200여대의 택시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위를 벌렸다. 그날 밤 MBC가 전소되고 광주시청과 광주경찰서, 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점거되었다. 석가탄신일인 21일부터 광주시내는 사람의 강물을 이루고 3시쯤에 공수부대의 집단사격으로 금남로 일대가 피바다가 되었다. 시민들이 나주와 목포등지에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시민들은 도청을 접수하였으며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이로서 광주는 해방구가 되었다. 26일에 열린 제 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서는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27일 오전 1시 상무충정작전이 개시되었고 5시 10분경 군은 도청을 장악했다. 5월 26일부터 6월 18일까지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61명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의 체포와 더불어 다시 박정희의 유신잔당인 신군부가 구테타로 정권을 찬탈하는 것에 치열하게 항쟁하였다. 광주에서 “전두환 유신잔당 물러가라”는 투쟁과 구호가 일어나자 신군부는 탄압의 본 때를 보여주고자 잔인하게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진압하고 이로써 학살극이 결과적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미국도 광주사태와 참극에 명확한 책임이 있다. 미국은 신군부의 5.17구테타를 용인했고 방조한 세력이었다. 또한 이 미국이 20사단의 광주 출동을 승인했고 학살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두환의 신군부는 과거 그들의 상전과 롤 모델이었던 박정희의 후예답게 국보위를 만들고 전두환을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임하면서 철권 신군부독재의 길을 달려갔다. 이들이 제5공화국을 통해서 독재권력에 가장 장애물이 되는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하며 저들의 어용언론으로 만들고 양심있고 의로운 언론기관에 있는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 해직시켜 버렸다.

 신군부는 광주항쟁과 학살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하고 왜곡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은폐하였어도 1980년 중반에 들어와서 대학가는 4월혁명을 기리면서 광주출정가를 불렀으며 5월이면 광주를 상기하면서 투쟁의 거리로 싸우며 떨쳐나갔다. 광주항쟁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던 반미자주화운동을 촉발시켰다. 철학도 신념도 없는 레이건 미국정부가 전두환의 파쇼 정권을 방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2년에 부산의 미문화원방화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1980년대의 반미자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가는 양대 축을 형성한 것이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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