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지역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에 관한 얘기가 시대를 넘어 전설처럼 남아 있다. 소정방이 당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군과 협공하여 주류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이 씨줄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선가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질기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나는, 조선 고종 때 만든 『호남읍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소정방과 김유신이 협공하여 백제를 공략하고 서로 만나기를 기약했는데, 김(金)은 소(蘇)가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 절을 내소(來蘇)라 이름 짓고 소(蘇)는 김(金)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그 바위를 우금(遇金)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다. 또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펴낸 『부안군 군세일반』 이다. 이 자료의 명승 및 고적 편에 내소사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내소사는 해안선을 끼고 있는 변산 남쪽 끝에 위치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해구두타가 창건하였기에 소래사(蘇來寺)라 하였지만, 그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관내 우금암에서 오다가 일시 이곳으로 피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내소사(來蘇寺)라 고쳐  불렀다.

  두 기록에서 살펴보았듯이 소정방이 부안에 왔고, 소래사라는 절은 소정방이 방문했기 때문에 이름을 내소사로 바꾸었다는 친절한 설명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부안읍의 성황산도 상소산(上蘇山)이라 부르는 것은 소정방이 올라왔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과연 소정방은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안에 왔을까?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전라도 말로 빗감도 안했다. 전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은 660년 7월에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칠 때 신라군과 협공하여 함락시켰다. 소정방은 660년 9월 3일에 백제의 의자왕과 왕족 및 신료 93명, 백성 12,000 여명을 포로로 하여 군대와 함께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백제에 온 적이 없다.
  개암사를 중심한 주류성 함락에 관여한 장수는 당에서는 유인궤 등이 중심이 되고, 신라 장군은 28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지역에 오지도 않은 소정방 같은 사람이 온 것인 양 엉뚱하게 사실이 왜곡되고 진실인양 버젓이 이야기 되는 현실은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곡된 이야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첫째는, 백제 땅의 민중들이 나라가 망한 뒤에 지명과 관련하여 당의 장군이나 신라 승려 등의 이름을 끌어들인 결과일 것이다. 이들로 자기 지역의 연관성과 정체성을 삼아 망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차별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몸부림 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의상봉이나 원효방 등의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둘째는,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인의 사대주의를 강조하려고 역사를 왜곡했다. 사찰이나 산봉우리 이름을 외국 사람과 연결하였다는 사례를 들어 조선인의 의타심을 강조함직 하다.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조선 지배 당위성을 합리화하려 했다. 
  백제의 마지막 부흥운동 장소인 주류성에서 동문지가 발굴되면서 많은 것들이 사실로 다가온다. 조성 시기는 늦으면 통일신라시대, 이르면 삼국시대로 추정되었다. 주류성에 대한 그동안의 왜곡과 소문을 바로잡고, 더 많은 연구와 지속적인 관심이 커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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