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후 최초로 나타난 박정희.

4월 민주혁명은 위대한 혁명이었다. 우리의 최근의 촛불 민주혁명은 일찌기 동학혁명과 3.1운동과 4.19혁명으로 그리고 광주 5.18과 1988년 민주승리에 이어 촛불혁명으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 중에 4월 학생의거로 피를 흘리며 이룩한 4월 민주혁명은 피의 제단 위에서 어쩌면 최초의 우리 민중이 이승만의 전제와 독재의 12년간의 지배권력을 뒤엎어 승리한 혁명이었다. 흔히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만고불변의 역사처럼 이승만과 자유당의 극우 독재체제는 마침내 고귀한 생명을 제단에 바치면서 승리의 깃발을 나부꼈다. 그러나 너무 아쉽게도 그 혁명은 김수영 시인의 싯구처럼 자유를 위하여 비상은 하여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일 년 만에 참담하게 옛 일본군 소좌출신과 구 남로당 출신이나 배신자의 이력을 지닌 박정희가 이끄는 군부구테타에 의하여 너무도 짧고 무상하게 다시 전복되고야 만다. 그리고 남한은 다시 박정희의 시해에 의한 사망에 이어서 신군부가 집권을 하여 그 모진 연속선의 폭압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1988년에 비로소 긴 민주화투쟁과 고난 끝에 민중들에게 민주주의의 승리가 주어지게 된다. 무려 27년에 달하는 길고 긴 군부독재의 세월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의 붕괴 후에 허정이 이끄는 과도정부가 수립되고 새 내각제 헌법에 의거하여 1960년 7월 29일 양원제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의 압승과 윤보선이 대통령에,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임되어 8월 23일에 새 정부가 출범되었다.
이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혁명의 열기의 연장선상에서 치러진 새 헌법에 의한 7.29 선거에서 자금과 조직이 월등한 민주당이 상하 양원에서 206석을 얻었는데, 아직 민주주의와 의식수준이 낮은 농촌지역에서는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던 구 자유당 관계자들이 어이없이 60석 이상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비록 10석 정도의 작은 의석이었어도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진보혁신계가 의회에 진출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탁월한 대중정치가였던
죽산 조봉암이 4월혁명 일 년 전에 사형을 당하지 않고 건재하였더라면 민족의 통일운동이나 진보정치에 대단한 대중적 반향과 성과를 거두었을 가능성이 많았는데 이는 대단히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면 정부는 그간 오랫동안 독재정치를 근절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언론의 활성화와 각종 규제를 자유롭게 하였다. 이러자 봇물터지듯 오랫동안 쌓여온 각계각층의 사회의 제반 다양한 요구들이 터져나왔다. 특히 학생들과 노동단체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혁신계의 통일논의도 과감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960년 11월 여러대학이 연합으로 결성한 민족통일연맹과 진보계 인사들의 민족자주통일협의회등이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과 교류론, 남북학생회담 등을 거론하며 추진하였다. 이 당시에 해방공간에서의 분단극복의 열기처럼 다시 일어난 통일운동은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자주 통일 구호들과 함께 남과 북의 경제교류를 촉구하는 “이남 전기. 이북 쌀”과 같은 구호들도 등장했다. 그리고 이같은 국내의 통일논의와 열기 속에서 유엔총회에서 북한도 조건부로 초청한다는 결정이 1960년 4월 12일에 내려지자 원래 보수적이었던 장면 총리는 북한을 인정하는 통일이라면 차라리 그냥 분단이 좋다는 용렬하고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같이 고조되던 당시의 통일운동과 사회의 교원노조를 비롯한 진보적 민주주의 운동은 해방 후 특히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이후에 이승만과 한민당 중심에서 비롯하여 자유당 독재로 이어진 긴 세월 동안에 오직 극우와 보수 반공이데올로기를 전가의 보도의 무기로 삼아 온갖 기득권을 누려왔던 세력들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위기감과 불안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이승만과 권력으로는 대적하는 야당이기는 했으나 본질적인 정치이념으로는 똑같은 극우 혹은 대단히 보수적인 친일파. 대지주.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보수정당이 분명한 민주당은 적극적인 통일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당시 사회와 대중의 긴박한 요구였던 3.15 부정선거 책임자들과 부정축재자 처벌에 대해서도 대단히 미온적인 무능함과 무소신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같은 사회심리적 대중의 불만과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치솟는 혁신과 진보세력의 발흥에 대한 보수주의세력의 불안과 친미 반공세력을 교활하게 이용하면서 이 위기국면에 대한 강력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박정희와 군부구테타였다.

전 대통령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하였지만, 자유당 치하에서의 부정선거의 원흉들과 사범들의 처결 및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 국민들의 요구가 대단히 거세었다. 장면 정부는 1961년 봄에 댐건설을 포함한 대규모 국토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 재원 마련에 부심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려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들은 국민들의 개혁의 요청과 열망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강력한 개혁정책의 추진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정권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 김도연과 장면 총리의 신파로 분열하다가 결국 구파가 독자적으로 신민당이라는 신당을 결성하여 정파싸움에 휘말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 분당과 파벌상태에서 세간에 돌던 구테타 음모설에 대해서도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하다가 결국 이들은 9개월 만에 정권의 붕괴를 자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군부구테타 발발에 있어서도 구파인 윤보선은 초기에 이들을 용인한 심리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가 눈을 뜨면 연일 이어지는 각종 데모들로 어수선하던 와중에 1961년 5월 16일에 옛 일본군 소좌 출신의 육군소장 박정희가 이끈 군부가 구테타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사실 군부를 대표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군사구테타에 동원한 세력은 김종필의 육사 8기를 중심으로한 장교단 200명과 함께 사병 3. 600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소수세력이었지만 무능한 군부지도자들을 제끼고 한강다리를 새벽에 넘어온 이이들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군부세력은 장면 민주당 정권의 무능력을 공격하고 비판하면서 국회를 해산한 후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부독재로 돌입하였다. 그간 4월혁명 후에 모처럼 민주화를 이룩하고 다각적인 민족통일을 위한 논의와 노력을 기울이던 모든 움직임도 군부구데타 앞에서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이름으로 5월 19일에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장악하고 7월 3일에 박정희가 의장이 되면서 언론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무려 269명에 달하는 정치인들의 활동을 6년간 금지시켰으며 헌법을 개정하고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비밀리에 사전에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군부와 박정희는 수차 민정이양을 약속하고 민정에 자신은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사기와 공염불에 불과하였고 결국 4년간의 군정 연장안도 내놓았으나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박정희의 오른팔 김종필 정보부장에 의하여 사전 창당된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1963년 2월에 되었다. 제3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의 대결이 있었으나 박정희의 당선으로 5.16군부 구테타 세력의 민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군정연장이 이어진 것이었다. 이어서 11월 26일 제 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국회의원 정수 175석 중 민주공화당이 110석을 차지함으로써 박정희 민주공화당의 독재가 합법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박정희와 공화당 정권은 민주당 정권에서도 마련하여 시행하려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962 년부터 자립경제와 조국근대화라는 미명의 목표아래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은 미국과 일본을 통하여 조달하였다. 이들은 국내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하고 수출산업과 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 지원하였다. 반면에 심각한 그늘과 문제와 부작용들도 수반되었다.  적자수츨과 출혈의 몫은 모두 국민대중에게 돌아왔다. 또한 수출을 통한 이득은 사실상의 수출 대상국인 미국과 일본이 가져가며 심각한 대외의존 속에서 국내의 독점자본과 기업을 재벌로 성장시켜주면서 부패한 정경유착의 관계와 관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수입도 수출보다도 크게 증가하고 무역적자와 역조의 심각성 속에서 불어난 외채상환의 부담도 경제전반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국가경쟁력의 제고라는 미명으로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강요당하고 농민대중은 저곡가정책으로 만성 가난에 시달리다가 도시의 빈민들로 탈주 이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말에 정보부장 김종필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외상 오히라와 비밀회담으로 대일청구권은 무상 공여 3억불, 재정차관 2억불, 산업차관 2억불로 타결짓고 어업문제는 기존의 평화선을 폐지한다는 협상을 하였다. 이는 내용적으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도 없이 매우 굴욕적이고 우리 민족을 일제가 착취한 댓가를 헐값인 겨우 3억불로 처리하고  국민감정을 크게 자극하여 격렬한 한일회담반대가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급기야 박정희정권 자체를 반대하는 대규모 6.3사태로 부르는 반정부투쟁으로 확대되었다. 1964년 6월 3일에 서울시내의 각 대학에서 엄청난 규모의 반대시위와 규탄대회가 열리고 시위가 계속되자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반정부투쟁을 제압하였다. 그 결과로 정부는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하고 8월에 여당의원만으로 국회에서 한일경제협정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일본과의 수교와 함께 외자를 일본에서 들여올 수 있었고 일본자본의 침투와 더불어 대일무역적자가 커지고 일본의 공해유발산업이 한국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969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률도 하락세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직 가시적인 고도성장의 허울과 현실에서  신흥독점재벌과 유착된 부패한 세력들의 배를 불리면서 국민들은 막상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의 심각한 현실 속에서 상대적인 빈곤과 박탈감에 신음해야만 했다. 심각한 부패는 군부집권 초기의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워커힐사건, 빠찡고사건, 이른바 3백 산업인 밀가루, 설탕, 시멘트폭리사건 등이 공화당 창당을 위한 정치자금 조성에서 부터 시작되어 부패는 온전히 박정희 집권 내내 고질적인 정경유착으로 구조화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박정희는 1967년 제 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영구집권의 길을 획책하게 되었다. 이에 국민들의 영구집권을 위한 3선반대투쟁과 시위가 대단히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날치기 통과로 3선개헌안을 통과시킨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갖은 부정선거의 자행으로도 근소한 차이로 이겨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뒤이어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야당이 개헌저지선의 3분의 1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국가안보의 위기상황을 빙자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2월27일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비상대권을 확보하여 독재의 길로 나갔다. 잠시 남북의 화해국면과 7.4 남북공동성명까지 발표하며 이른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기초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통일을 촉진시킨다는 합의도 만들었으나 이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체제를 준비하는 사전모의극과  계획에 불과하였다. 드디어 10월 17일에 박정희정권은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완전 독재로 가는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이같은 유신체제가 유신헌법에 의하여 국회해산과 함께 새로운 통일주체대의원들의 체육관 선거로 다시 박정희를 임기 6년의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3권분립을 파괴하면서 사실상의 총통제의 장기집권을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 유신철폐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비롯하여 강력한 반정부투쟁이 전개되고 전국적인 학생운동과 민주주의를 위한 다양한 제세력의 민주주의를 위한 장기적인 항쟁이 이어졌다.

5.16 후 부안에서도 박정희 군사독재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 집권에 까지 이어지는 세월에 부안에도 이들 정권에 기생하고 특권으로 이어진 그룹과 계층과 인물들이 생겨났다. 여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부안 오적이라는 오명이 회자되기도 했다.
 
아직 부안에서의 여중은 있었으나 고급 여성교육이 부재상태였는데 어렵게 36명으로 부안여고가 의미 깊게 시작되었다. 여기에 금아 김태종의 막내딸 김선이 입학을 하여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 훗날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부안여고가 개학한지 한 달여 만에 5.16이 터졌다.

함석헌 선생의 5.16직후 교사연수차 이례적인 부안방문.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독재 구테타를 맹렬히 성토하던 광야의 세레 요한과도 같던 함석헌 선생이 모처럼 부안에 모처럼 왕림하여 변산해수용작에서 의 교사 하계연수의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서슬퍼런 군부 계엄령하에서 그들이 기피하는 함석헌 선생을 초빙한 이는 당시의 부안 교육장으로 재임하던 최재섭의 신념과 용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결국 그는 곤욕을 치루었다 한다.

한말의 거유 간재 전우 선생이 살았던 계화도는 1960년대 초까지는 섬이었으며 바다였다. 그러나 군부정권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이 시작될 때 국내 최대의 간척지 사업을 벌인 곳이다. 박정희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식량자급 달성을 위해 대한민국 제1호 간척사업인 ‘계화도 간척공사’를 1963년 최봉채 군수시절에 강력히 착공하고 추진했다. 바닷가에 둑을 쌓고 고인 물을 빼내자 곡창지대가 됐다. 방조제가 완공되자 농경지가 조성되고 1978년부터 쌀이 생산되면서 ‘계화미’라는 상표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부안의 여당화를 촉진한 계화도간척공사.

부안은 이례적으로 해방 후와 군부독재시절에 전통적인 야도인 전북 내에서 보수 성향이 비교적 강했다. 1963년 5대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53.80%를 얻어 36.49%를 얻은 윤보선후보를 17% 이상 앞질렀고, 1967년 6대 대선에서는 전북 전체에서 윤보선이 이긴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정희 후보가 45.57%을 얻어 0.89차의 근소한 격차로 앞섰다. 또한 동시기에 치뤄진 6대 총선도 민주공화당 이병옥 후보가 32.63%의 득표율을 얻어 민정당 김용대 후보를 0.07%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어 두 선거 모두 집권 여당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4년 뒤 깨졌는바, 1971년 7대 대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61.69%를 얻어 35.15%에 그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큰 차이로 앞섰다. 그러나 동시기에 치뤄진 7대 총선에서는 민주공화당 이병옥 후보가 59.69%를 얻어 과반 이상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당선을 이뤄냈다. 이는 군출신인 이병옥의 개인기와 더불어 당시 1970년대 계화도 간척으로 넓은 농지와 이주민이 들어서면서 경제적 효과를 얻으면서 보수성향을 보인 부안군의 민심이 반영된 결과로 야당세가 돌풍을 일으킨 7대 대선이 오히려 예외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이처럼 당시에는 부안이 독재 정권의 편에 서는 보수 정당에 대한 강한 지지세를 보냈었다. 그러한 이유에는 계화도 간척으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로 박정희 개발신화에 대한 강한 믿음이 생긴 것과 집권 여당에 대한 민심이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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