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치하 국정농단 주범은 이기붕과 박마리아 가족이었다.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를 보면서 외국의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찾는 것은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를 찾는 일과 같다’라고 조소했었다. 그러나 위대한 한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소위 국부 이승만과 자유당의 무서운 성채를 피의 화요일로 뒤엎고 민주혁명을 이루고야 말았다.

요즘도 그랬었지만 1950년대에 이승만과 자유당의 멸공통일 및 북진통일론에 의하여 젊은이들은 모두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군대에 징집되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부정과 부패의 고리 속에서 병역기피를 위한 갖가지 수단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부모가 힘깨나 있는 가정에서는 그 자녀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군대를 기피하였다. 또한 대학입학도 출세를 위한 징검다리일 뿐 아니라 징집을 피하는 수단이었고 그래서 가난한 농촌과 집안에서도 기를 쓰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한 이른바 '우골탑'이라는 말과 '먹고대학생'이라는 말도 회자되었다. 이른바 빽 없는 민중의 자녀들이 핫바지들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세태였다. 빽도 아무런 대책도 없는 가난한 청년들이 기피하는 방법은 자신의 소중한 신체를 자해하는 일이었는데, 이런 현상도 사회적으로 적지 않게 양산되었다.
 
1950년대의 노동운동은 완전히 어용단체인 대한노총이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집단으로 들러리를 섰다. 특히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이승만은 모양새라도 원래는 불출마를 선언하였지만 이들이 동원한 우마차 800대를 출동시켜 소와 말도 이승만의 대통령 출마를 원한다는 이른바 '우의마의'의 해프닝이 연출되었다. 노동운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노동을 통제하고 권력의 입맛대로 군중으로 조직이 동원되는 전형적인 옐로우 노동운동과 조직이 대한노총이었다.
 
이 시절에 사회적으로 깡패들이 양산되었다. 이들 깡패들은 자신의 구역을 정하고 상인들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민중들을 괴롭혔다. 이들 깡패들은 집단적으로 행세를 하고 급기야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특별히 자유당 정권은 깡패들을 정치에 동원하고 이용했다. 대한민국이 깡패 폭력공화국이 된 것이다. 깡패출신인 임화수가 반공예술단을 결성하고 서울시내의 주먹들 위에 군림을 했던 이정재는 일약 자유당 중앙당의 감찰부장이라는 공식 감투를 쓰며 행세하였다. 이들 깡패들은 각종 선거 현장이나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등에서도 개입을 하고 1957년의 민주당의 장충단공원 집회의 방해 등의 야당의 집회와 조봉암의 진보당 지부의 결성 등에도 파괴를 위한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급기야 1959년에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대통령 부통령 선거의 당선을 위하여 결성된 '반공청년단'은 종로구단장에 임화수 휘하에 유지광 등 주먹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임화수가 1959년 3월에 반공예술인단을 만들고 배우와 가수들을 끌어들이고 이승만의 우상화 작업을 위하여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관람을 시켰다. 명백한 이승만의 당선을 위한 아부와 충성작업이었다. 

소위 국부로 추앙되던 이승만에게 1956년의 대통령 선거는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는 결과였다. 노골적인 정부와 관과 경찰에 의한 부정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혁신계인 죽산 조봉암이 간담을 서늘하게 210만표를 얻어 500여 만 표의 이승만의 턱밑에서 위협을 한 것이었다. 오죽해야 조봉암과 진보당은 “선거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결과는 어거지로 음모와 날조로서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시키고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도록 해산을 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조봉암을 1960년 3.15선거 일 년도 못되는 1959년 7월31일에 법의 재심청구의 권리도 무시한 채로 죽산을 잔혹하게 사형시킨 것이었다.

이미 조봉암도 신익희도 사라진 상태, 그리고 야당의 대선후보인 조병옥의 미국에서의 사망으로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가 닥쳤을 때에 이승만의 당선이 사실 유력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지나친 고령이기에 불안한 자유당세력은 그가 유고시에 정권을 맡을 부통령에 이기붕의 인물과 위상이 약하였음으로 그것까지 감안해서 압도적인 선거의 승리를 목표로 하였다. 소위 국부 이승만의 추락된 자존심을 세워주고 현실적으로 독재에 항거하는 민심과 야당이 두려워서 자유당 정권은 ‘압도적’인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으로 인한 영구집권을 위해서 참으로 노골적이며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기획한 것이었고, 그 총기획을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맡았다. 그는 1959년 11월부터 과거의 경찰만이 아니라 전 공무원들의 부정선거 방안을 직접 고안하고 지시해서 선거전의 이미 4할 사전투표, 3인조와 5인조 투표, 유권자 명부 조작. 현장에서의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지, 투표계산서 조작 및 완장부대를 동원한 위협 등의 참으로 기상천외의 온갖 부정선거 방법을 총동원해서 3.15선거에 임했다. 여기에 친일파들과 정치깡패집단과 모든 어용조직이 풀로 가동되었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너무도 노골적이고 공공연한 부정선거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분노는 대구에서 1960년 2월 28일에 터졌다.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가는 것을 막고자 강제로 등교시키자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로 경북고 학생들이 일어서 나섰고 이어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이 시위를 벌렸다. 마침내 최초의 유혈시위가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났다. 마산 민주당에서 자유당의 ‘4할 사전투표’에 항의하고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부정선거를 폭로한 시위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저녁에 동조하여 함께 시위를 했다. 이 때 정전 속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어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고 연행되었다. 이 유혈발포로 3월22일에 최인규가 해임되고 홍진기 전 법무가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시위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4월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마산의 제2차 항쟁이 4월 11일에 발발한 바, 지난 3.15 시위 때 눈에 최류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하게 떠오르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해일로 변했다. 시민 2만 여명이 마산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고 파출소들은 습격을 당했다.

마산에 이어서 4월 18일에 서울에서 3천여 명의 고려대생들의 시위가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대생들은 ‘민주역적 몰아내자’는 플래카드로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여 대정부건의문을 결의했다. 이들이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청계천 4가에서 정치깡패이며 반공청년단 종로구단장인 임화수의 지휘 아래 100여 명의 부하 깡패들이 습격을 하여 수십 명의 학생들이 쇠망치 등으로 얻어맞고 쓰러진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분노한 학생들이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서울대학과 시내의 대학생들이 여대생들까지 포함하여 일제히 쏟아져 나오고 중고교생까지 데모에 합류하여 무려 10만 명 이상이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메우며 시위했다. 그리고 일부대학생들이 경무대로 방향을 돌리자 오후 1시 40분에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이로부터 야간에 이르기까지 ‘피의 화요일의 유혈사태가 터진 것이었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불타오르고 파출소들이 파괴되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지방에서도 항쟁과 분노의 불길이 번져서 19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부산과 8명의 희생자가 나온 광주를 위시해서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4월 19일에 경찰 4명을 포함해서 115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경찰 합하여 727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같은 비극적 사태 앞에서 미국이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4월 21일에 국무위원들의 일괄 사표 및 퇴진과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고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드디어 258명의 대학교수단이 4월 25일에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후에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서며 대통령과 국회의원, 대법관등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자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시위는 자정까지 계속되고 다음 날이 밝자 아침 5시부터 시위 군중들은 더욱 늘어나며 7시경에는 무려 3만여 명의 군중들이 드디어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급기야 서대문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고 9시 45분경에는 파고다공원의 이승만의 동상이 군중들에게 끌려 동댕이쳐졌다. 10시경에 시위 군중들이 10만 명으로 불어났다. 10시 20분경에 이승만이 시민대표와의 면담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가 무너지고 독재권력이 국민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184명의 고귀한 생명을 바치며 고귀한 피를 뿌리면서 자유 승리의 나무가 꽃을 피운 것이었다. 부상자는 무려 6000명에 달했다. 결국 이기붕 일가는 그 아들 이강석이 쏜 총격에 의하여 모두들 처참히 사망하고 대통령 이승만도 하야 후에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허정에 의한 과도정부 수립 이후에 장면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


6.25 이후 부안에서도 당연히 보수 우익들이 정치와 사회를 장악했다. 원래 부안 백산 출신이며 지운 김철수의 이복 동생인 김창수가 백산이 가까운 정읍의 갑구에서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원생활을 하였다. 김철수 선생의 가족들이 모두들 좌익으로 활동하다 곤경과 고통을 당한 환경에서 김창수 또한 일제하에서는 사상활동에 관여하였다가 이례적으로 해방 후에는 전향하여 자유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젊은 날에 무기수로 감옥에 들어가서 청춘을 저당을 잡히며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고난을 살은 기간은 27년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통혁당사건으로 영어의 생활을 한 고 신영복 교수의 수형기간은 20년이었다. 장기수로 이북에 송환된 이인모 옹도 34년의 수형기간이었다. 아마도 우리분단의 끔찍한 비극적 상황에서 그들의 사상적 입장에 동조하던 아니하던 간에 그 분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고 긴 고난의 삶을 살은 장기수들에게 우리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살은 고통과 세월과 삶의 의미를 더듬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안출신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있지만 36년, 32년의 세월을 장기수로 살은 분들이 있다.

부안 출신의 장기수 허영철.

보안면 출신의 허영철은 가난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조선과 일본의 홋가이도에 이르기까지 노동판을 전전하다 해방을 맞아 남로당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다가 보안면 당위원장을 지내고 6.25 공간과 인공시절에 군당 선전부장을 거쳐서 부안군 인민위원장을 지낸 허영철은 월북하여 금강정치학원 등에서 수학하고 이북의 장풍군 인민위원회부위원장을 하다가 1955년 남한에 밀파되어 무려 36년간의 장기수형을 살았다. 그는 긴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출옥 후에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성실히 근무하면서 물리학과 수학, 천체학도 공부하면서 2011년에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2006년 그의 삶을 구술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가 출간돼 화제를 불러 모았다. 부안군 동진면 출신의 임방규도 무려 32년의 장기수로 살다가 출옥하여 생존하고 있고 필자와도 귀한 대담을 나눈바 있는데 적당한 기회에 소개를 할 예정이다.

 4.19혁명과 함께 부안사회의 유력한 보수적 인물이며 유지이던 백주 김태수가 자유당 부안군당의 수석부위원장과 선거대책위원장의 역할을 하여 3.15 부정선거에 관여한 혐의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에 걸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도 다음 해에 민주주의에 역행한 5.16 군부쿠테타 이후에 유야무야 해소되고야 만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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