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은 이름만 남아 속세를 지켜보네

내변산 풍경 ⓒ 염기동 기자

어허, 가을이라. 용화동에서 본 우슬재 하늘은 시퍼렇다. 전날 내린 비에 먼지도 씻기고 구름도 녹아내린 모양이다. 변산 들어가는 첫 들머리, 시퍼런 우슬재를 넘어간다. 일제가 변산의 나무 수탈을 위해 뚫었다는 길은 구불구불 정상을 향했다. 혹시 소도 재를 넘어가다 무릎이 아파서 쩔뚝거린다 해서 우슬재가 아닐까 상상을 했다.

김형주 선생은 “변산에 24개 명당(혈)이 있고 내변산 넘어가는 길목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명당(와우혈) 자리에서 무릎에 해당된다 해서 소물팍재, 우슬재”라며 찰나의 상상을 당장 바로잡는다. 들머리는 군사용어로 새롭게 구성하면 ‘전략적 요충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6·25 뒤에 빨치산이 방어선을 쳤고 이로부터 200여년 전에는 이인좌의 난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이 관군에 대항해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우슬재를 넘으면 신천지다. 기개 높게 푸른 소나무가 뻗어 있고 햇볕에 알몸을 드러낸 기암괴석이 땅을 굽어본다. 나지막하게 산으로 달리는 길, 옆에는 물길이 나 있고 논이며 밭이 시야를 틔운다. 감나무에 달린 감, 소나무 숲에서 옅게 번지는 단풍의 기운까지 빨강 파랑 초록 노랑이 흐드러진 꽃이다.

천길 낭떠러지 어수대를 지나쳐 일행은 청림마을 회관으로 들어섰다. 들어갈 때 길은 좁았지만 정작 마을로 들어서니 품이 넉넉했다. 야트막한 평지에 자리를 잡은 집이 어림잡아 100호는 충분히 돼 보였다. 이곳이 바로 청림사가 있던 자리였다.

청림사 대웅전 터로 추측되는 곳의 석축 ⓒ 염기동 기자

헌데 주민들도 절이 있었던 줄 모르는 모양이다. 탑거리를 찾느라 한 노파에게 절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노파도 “저기 이장네 집 우에가 탑거리여”하고는 자세하게 알려주면서도 “여그는 절 없어라우”라며 마당에 핀 맨드라미 같은 웃음을 짓는다.

탑거리를 찾았다. 지금은 탑 대신 묘지가 자리를 틀었다. 김형주 선생의 말대로 모든 지명에는 역사가 숨어 있다고 이 탑거리라는 땅 이름은 이 마을에 절이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아따 많이 변해버렸네. 여기 와서 조사한지가 35~36년 되거든. 인자 가늠이 되네. 여기가 탑거리면 저쪽 감나무 뒤에 그 근방이 대웅전이겠네.” 직접 문화재 조사를 했던 그가 30년 세월을 간신히 뛰어 넘었으니 절의 흔적이 200년을 살아남는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길가에 자리를 잡자 김형주 선생의 유려한 역사 얘기가 시작됐다.

탑거리 ⓒ 염기동 기자
부안여고에 있는 옥계석 ⓒ 염기동 기자

개암사에 있는 석불 ⓒ 염기동 기자
“변산부터 얘기해야겄네. 변산은 이름을 네 가지로 불러요. 가장 흔한 것이 가장자리, 바다쪽 가장자리에 있다고 해서 갓변(邊)자 변산이잖아. 그게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이고. 신선사상으로 부르는 이름은 선계산, 이건 삼국유사에도 나와요. 그다음에 봉래산, 봉래산도 삼신상 중 하나니까 도교에서 나온 명칭이거든. 그다음에 불교적인 명칭이 있어요. 그것이 능가산이여. 능가경이라는 경전에서 따온 이름인데 변산에 절이 많잖아요. 절이 많아서 불교문화가 상당히 융성했단 말여. 근데 그중에서 능가경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여. 능가경은 대승불교의 한 책이에요. 능가경 중심으로 맥을 이어온 것이 달마여. 선불교지. 그러니까 변산에서는 선불교가 융성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

불교가 융성하다보니 변산에 팔만 구암자가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 구암자’로 시작하는 정선아리랑처럼 변산에도 금강산같이 절과 암자가 많았다는 얘기다. 그 중에서도 변산의 4대 사찰에 꼽힐 정도면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개암사나 월명암은 아예 없고 지금은 사라진 선계사, 청림사, 실상사가 이름을 올렸고 나머지 하나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내소사가 들어갔다.

“청림사가 굉장히 큰 절이라는 거는 짐작으로밖에 알 수 없어요. 아무 기록이 안 남아 있거든. 다만 내소사에 가면 보물로 지정돼 있는 고려동종이 있잖아요. 그것이 1222년에 주조된 것이거든. 고려 고종 3년인가 돼요. 그 종을 청림사에서 주조했어요. 종에 명문이 다 남아 있어. 그런 걸로 봐서 큰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뭘로 짐작하느냐 하면 청림 밑에 노적메(노적마을)에 승시가 섰다는 거여. 중들의 장이 섰다 그 얘기여. 중들도 먹을 것을 조달하려면 시장에 가야 할 것 아녀? 수가 굉장히 많으니까 밑에 장이 선거지.”

이렇게 영화를 누렸던 절은 조선 영조 4년인 1728년에 운명이 뒤바뀌었다. 바로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이 변산 청림사에 자리를 잡으면서 절의 운명이 끝났다는 것이다. 무신난은 같은해 3월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과 남인 일부가 영조의 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김형주 선생은 이인좌의 난이 나고 관군이 절을 완전히 태웠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인좌의 난 때 호남지방에서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이 꽤 있어요. 주로 태인하고 부안 사람이 주동이 됐어요. 부안사람은 누가 주동자냐 하면 고희 장군의 손자 고응량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사람이 부안 책임자여. 고응량의 머슴 중에 정팔용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정팔용이 아마 기운도 세고 그랬던가 봐요. 정팔용이 고응량의 명을 받들어서 반란군들을 모집해서 청림사를 점령을 했어요. 청림사에서 주둔해서 호남의 좌청룡 군이라고 해서 여기서 훈련을 했어요. 서울을 쳐들어가기 위해서.

그때를 기약 하고 훈련을 하다가 역모가 밝혀져서 관군들이 토벌해서 다 잡혔거든요. 그 때 우슬재를 반란군들이 딱 막아버리면 관군들이 쳐들어 오들 못혔어. 청림사는 최소한도 1728년 이전까지는 있었다 그 얘기여. 그러니까 반란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절이니까 소탕한 뒤로는 폐철 시켜버린 거여. 그 절을. 아마 불질러 버렸을 거여.

그 때 고려 동종도 묻혀버린 거지. 근데 고려 동종을 1853년에 캐냈어, 여기서. 대웅전 자리를 밭으로 갈아먹었는데 뭘 심느라고 농부가 괭이질을 하니까 쇳소리가 나거든. 파보니까 종이 나왔어요. 재밌는 전설이 있는데 그 종을 아무리 때려도 울들 안 했다고 해요. 실상사도 불러보고 여러 절을 부르면서 쳐도 소리가 안 나는데 내소사 하면서 치니까 웅~하고 울더래요. 그래서 내소사로 가져갔데요.”


내소사에 있는 고려동종 ⓒ 염기동 기자

보물 277호로 지정된 내소사 고려동종이 사실은 청림사 고려동종이었다는 얘기다.

청림사는 영욕이 엇갈린 세월을 무단히 보냈던 모양이다. 200여년 전에 불타 없어지기에 앞서 한 번 절을 옮긴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옛 청림사도 불타서 없어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김형주 선생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원래는 청림사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부안댐으로 물이 차버려서 못 건너가는데 서운암이라고 하는 데를 지나가면 옛 청림사 자리가 있어요. 옛 청림사가 불타버리니까 이쪽으로 옮겨 온 거야. 옛 청림사 자리에는 돌로 된 지장보살 불상이 있었어요. 이것도 내가 조사보고서를 내서 문화재로 지정했거든. 왜 지정을 서둘렀냐면 절도 없고 노천에 불상만 있으니까 골동품 상들이 그걸 훔치려다 동네 사람들한테 들켰다고 그래. 지금은 개암사에 따로 모셔 놓았지.”

절이 불타고 나서 유물은 어처구니없게 훼손됐을 게 뻔하다. 탑의 층과 층을 잇는 중간 지붕인 옥계석이 벌통 받침으로 쓰이기도 하고 축대 쌓는 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중 옥계석 하나는 한쪽 귀퉁이가 깨진채 방치된 것을 부안여고에 옮겨 놓은 것도 있다고 했다.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기에는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너무 크다.

고려 때 큰 스님 선탄은 청림사에 머물며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온다. 옛 절의 풍채를 후대의 사람들이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을 미리 알고 위로하는 듯도 하다.

구름처럼 떠돌아도 옛 산 생각하고
사슴은 숨어서 깊은 숲으로 돌아가네
부귀영화 생각하면 흙같은 것을
높고 한가함 얻으려면 돈이 쓰이네
솔바람 소리에 학 울음 들려오고
고갯마루 뜬 달빛 거문고에 가득하네
이 뒤로는 세상의 뜬 자취(연화적·烟花跡)
사람들 와도 찾을 곳이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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