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을 찾아든 날은 벚꽃이 활짝 핀 때였다. 벚꽃은 좋은데 동네사람 외에 구경 나온 사람은 없었다. 이 날은 이곳에 살고 있는 최경순 할머니와 동생 효진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작년에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최옥철의 억울한 죽음을 듣고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침 흐드러지게 핀 하얀 벚꽃 터널을 지나 사자동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들 집안이 이곳에 살게 된 것은 몸이 아픈 증조할아버지가 수양 겸해서 내변산으로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통정대부를, 할아버지는 진사를 했다고 얘기한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서당 훈장을 하기도 했다. 설 명절이라도 되면 인근에서 세배를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루 점드락 불을 때서 음식을 대접했다. 근동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었고 인심 좋은 할머니 옥계댁을 처자들은 많이 따랐다. 
최옥철은 밭 열세 마지기와 논 다섯 마지기를 부치고 일소를 먹였다. 소가 좋아서 소 매나갈 때는(농사철에 소를 빌려감) 쟁기질꾼이 쌀 아홉 짝을 주었다. 야지로 소가 나갔다 돌아올 때는 바싹 야위어 돌아왔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불쌍하기도 했다.
이 집안에 어려움이 닥친 것은 한국전쟁이다. 전쟁 통에도 논밭이 있고 가축이 있으니 최옥철은 밖으로 피난 갈 생각을 못했다. 어느 날은 빨치산들이 중계에서 회의를 하면서 본인의 의견도 묻지 않고 참석하지 않은 최옥철을 지역 농민위원장으로 뽑아놓았다. 나중에 알게 된 최옥철은 놀라서 항의를 했다. “명단에서 내 이름을 빼주시오. 나는 할지 아는 것이 농사뿐인게요. 나는 그런 일 못합니다.”
빨치산들의 요구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밤이면 집 뒤에 파놓은 굴에서 은거했다. 어느 날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새벽 먼동 틀 때 아버지는 경찰에게 끌려갔다. 경찰은 최옥철에게 빨치산의 아지트를 대라고 추궁했지만, 활동도 안했고 모르니 얘기할 수가 없었다. 끌려간 아버지는 매를 맞다가 결국은 의심하는 경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총소리가 두 번 났다. 1950년 섣달 열이틀이다. 어머니는 유복자를 가진 상태였고 경찰은 아버지의 죽음이 부당함을 알았는지 이들 가족에게 쌀과 미역을 주기도 했다. 이 일 후에 상서 내동으로 나가서 피난 생활을 했다. 어머니와 최경순은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찾으려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다음해 봄에야 실상사 밑에서 아버지 것으로 보이는 검은 두루마기와 큰 뼈 몇 점을 수습했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맞은 최경순은 ‘지울러지는대로 사는 것이 현명흔데 고진 노릇하다가 돌아가셨다’고 눈물을 보인다. 68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못한다. 주변에는 일찌감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자수하여 변절한 후에 빨치산 동료를 잡기 위해 동원되면서 오히려 경찰에게 대우를 받고 그 후 잘 먹고 잘 산 사람들도 있었다.
광주에 있는 탐진최씨 문중에서 최효진에게 종손이니 나오기만 하면 어려움 없게 해준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리 통에 배우지 못해서 문중에서 오라고 해도 위축되어 못 갔다. 애들 하나라도 가르쳐서 가겠다고 마음먹다가 때를 놓치기도 했다. 그날 헤어지면서 사진을 찍자고 하니 어색해하면서도 이들은 서로 손을 꼬옥 잡았다.
전쟁 중에 비전투병인 민간인들의 죽음은 큰 비극이다. 최옥철 같은 억울한 죽음이 변산에서 어디 한사람뿐이었겠는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첫 단계로 전수조사라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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