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만명이 있었던 거제도포로수용소..그중에 시인 김수영도 있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의 <풀>

6.25 전쟁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에서는 전쟁난리 속에서 아까운 생명들이 잡초와 파리 목숨같이 짓밟히고 죽어가는 마당에서 살아남는 것 만해도 다행이고 요행인 경우들이 현실이었다. 3년의 모진 전쟁의 포연이 그치고 드디어 휴전이 되면서 전쟁은 멎었지만 그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은 특히 민중의 삶에서 깊고도 깊었다. 전쟁에서 전사나 사망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포로로 된 이들도 많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무려 17만이 수용되기도 했다. 시인 김수영도 북한 의용군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수용되었다가 1953년에 석방되었다. 숱한 이 땅의 젊은이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전쟁 속에서 혹은 전쟁이 끝난 후에 남북의 전후처리과정에서도 비극적으로 사라지거나 감옥에 갇혀서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한국전쟁에서 민중이 피를 흘린 비극의 터전에서 이승만과 그의 정치적 수족인 자유당은 추하고 부끄러운 전리품을 많이 챙기고 획득했다. 스스로 허황하기 그지없는 북진통일론을 6.25 직전에 떠들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니까 이승만은 서울시민을 안심시켜놓고 자신은 새벽에 명색이 일국의 대통령이 도둑괭이처럼 서울탈출을 해서 수원으로 도망을 갔었다. 그랬던 이승만에게 미국의 참전이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고 3년간의 전쟁에 이어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이 이승만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친미 반공 극우부패공화국이었다. 그의 정권욕을 위하여 그는 해방 직후에 한 때 야합했던 한민당과 절연하고 독자적인 자유당을 만들어 그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만들었다. 일본군 첩보사냥꾼이자 고문전문가 오장 출신 특무대장 김창룡을 이승만은 극도로 총애하고 일개 대령출신인 그를 국무회의에 출석시킬 정도였다.
 
원래 한국민주당 –약칭 한민당은 국내의 토착자산계급의 보수적 정당이었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오너는 바로 원래 생가는 부안 줄포였으나, 양자로 고창출신이 된 만석꾼의 아들 인촌 김성수(1891~1955)였다. 그가 지닌 막강한 재력과 일제하에 동아일보와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조선사회에서 유지로 역할을 했다. 그의 동생 김연수가 지닌 친일적인 행태와 함께 조선굴지의 재력을 밑바탕 삼아서,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참모였던 고하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보수적이며 친일적인 유산을 승계하는 부르주아 정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처음에는 이승만을 업고 그러나 김구 등의 임정세력이 귀국해서는 그들에게 기대는 행태를 보이다가 미군정의 실질적인 파트너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속성에서 친미 반공의 강력한 보수정당을 꾸리고 한국정치에서 그들의 역할을 하여온 것이었다. 이들 한민당은 이승만의 자유당과 비교할 때, 정치이념으로는 똑같은 보수정당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이승만과 정치적 입지를 달리하고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강력한 야당세력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때문에 김성수는 1951년 5월 2대 부통령에 짧게 재직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이 독재와 부패로 치달리자 야당세력의 강력한 반대와 투쟁이 있었다. 특히 1956년 5.15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나선 신립장군의 후예이자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1894~1956)는 서울 한강 백사장에 무려 30만의 인파를 모아놓고 이승만의 집권종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익희가 선거유세 도중에 5월 5일에 심장마비로 급서를 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신익희는 지운 김철수와도 일찌기 와세다대 동문이었고 상해시절에도 독립운동을 같이 해온 각별한 관계였다. 만약에 해공이 급서하지 않고 집권에 성공하였더라면 이승만의 독재도 종식되고 민주주의도 어느만큼은 개선이 되었을 터인데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이승만이 총애한 충견, 일본군 첩보 고문전문가 특무대장 김창룡.

그러나 신익희의 서거를 대신하여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1899~1959)이 무려 210만표를 얻어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로 대두되었다. 조봉암은 일찌기 조선공산주의 운동과 조공당 창당의 주역의 일인으로서 긴 감옥생활을 하는 등 베테랑 혁명가였으나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노선이 맞지 않아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인천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승만에 의해서 초대 농림부장관에 입각하여 남한사회의 숙원이던 토지개혁을 원만하게 처리해낸 공적도 인정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조봉암은 이후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면서 원내활동을 전개하고 국회부의장으로서 정치적 성장을 해갔다.
특히 이 땅의 한민당과 자유당의 양대 보수세력에 맞서서 조봉암이 혁신세력을 규합하고 진보당을 결성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자 이승만은 조봉암의 제거를 원하였다. 이에 특무대의 공작과 검찰의 합동작전에 의해 조봉암이 간첩혐의로 몰리고 진보당의 해산이 이루어졌다. 터무니없는 정치적 음모에 의한 공작으로 기소된 내용이어서 일심 재판에서는 의로운 유병진 재판장에 의해서 간첩혐의는 무혐의 처리되고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경무대와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이승만의 노골적인 조봉암 제거 의지에 검찰과 사법부도 완전히 굴복하여 2심과 대법원에서 간첩혐의로 사형선고가 이루어지고 재심청구도 기각하면서 졸속으로 신속히 조봉암을 1958년 7월31일에 사형시키고 만다. 4월혁명 바로 전 해였다. 이로써 일찌기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창당주역들이었던 조봉암과 박헌영은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공히 북한과 미제의 간첩혐의로 사형을 당해 이 땅에서 고혼이 되었다.

대한민국 경제와 정치는 철저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이미 작전지휘권도 6.25의 긴박했던 위기적 상황에서 미국에 넘어가 버렸다. 막상 정전협정도 남북한이 주역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과- 사실상의 미군- 북한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맺은 것이었다. 또한 경제적 현실도 최소한도의 자본주의의 윤리적인 범주 안에서의 경제시스템이 아니라 철저한 미국경제의 하부구조와 원조에 의존한 경제체제였으며 내부적으로는 자유당 정권과 결탁한 부패경제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일제가 남긴 적산처리와 전쟁 후의 폐허의 상황에서 온갖 특혜와 융자에 의한 이병철의 삼성을 비롯한 신흥재벌들이 양산되고 이어 원조자금 딸라와 금융특혜로 이들이 살찌었다. 막스 웨버가 말한 최소한도의 윤리적 기반도 지니지 않은 전형적인 정치권력과 강력히 깊게 유착된 천민자본주의( Paria Kapitalismus) 경제 행태와 구조였다. 특별히 밀가루와 설탕, 시멘트의 하얀 3백산업(三白産業)으로 일컫어지는 폭리가 대단했다. 삼성도 제일제당이 중요한 기업이었고 나중에 사카란 밀수사건으로도 이어진다. 각종 폐허의 상태에서 복구하는 건설경기도 언제나 엄청난 부패의 먹이사슬과 코미션과 정치자금과 착복이 난무하였다.

당시에 자유당 치하의 선거는 결코 민중이 하는 선거가 아니라 경찰의 지휘 하에 야당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방해하면서 당선을 저지하고 여당후보의 무투표 혹은 압도적 당선을 조작하는 선거였으며 이 결과에 따라서 지방의 경찰서장이나 군수의 승진 혹은 영전 및 좌천이 백일하에 이루어지는 현실과 행태였다. 내무장관과 그 휘하의 일선 경찰의 제일 업무가 공산당 때려잡는 일과 여당후보를 기필코 당선시키는 일이며 원래의 민중을 위한 치안업무나 대민봉사는 전혀 그들의 안중에 없던 것이 4.19 직전 까지의 이승만치하 천박, 야만, 노골적인 경찰국가의 현실이었다.

부안은 타지역에 비해 비교적 진보인사들과 좌익이 많았던 탓으로 전쟁으로 인해서 아까운 인물들이 많이 죽거나 스러지거나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 정치나 사회현실에서 극우와 보수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사라지고 소외되어진 이들을 조명하는 것도 민중사로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형주 선생에 의하면 6.25의 험한 전쟁의 세월에도 자신의 고향마을인 옹정같은 큰 마을에 희생자가 한사람도 나오지 않은 것은 옹정의 우익진영의 대표적 인물인 조현섭의 말에 의해서도 김형복, 김형식이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서기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로 모두 간에 인척이기도 했고 어려운 시절에 최선을 다해 서로 비호와 보호를 한 탓이기도 했으나 남노당에 가입한 전력도 없던 김형복의 경우는 결국 2달간의 마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한 탓으로 1.4 후퇴 때에 개암동 골짜기에서 학살을 당했다. 김형주의 친형인 김형식은 이 때 요행히 마지막 죽음의 길에 차를 타기 직전 친지가 빼내어 천행으로 살아났다. 생사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김광수(1903~?)는 공산주의자로서는 형인 지운 김철수를 제외하고는 부안출신의 공산주의자로서는 가장 큰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김광수는 대지주의 셋째 아들이자 김철수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그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서 1925년 2월 사상단체 전북민중운동자동맹 기관지 <민중동맹>을 발행하고 1926년 조선인 유학생학우회 간부가 되었다. 또한 동아일보 동경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박열사건’을 취재하여 서울에 송고했다. 1926년 9월에 정우회 집행위원이되고 1927년 1월 조선공산당 경기도당 조직부 위원이 되고 8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일본 오사까 조선중앙일보 일본지국장으로 일하면서 일본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산하의 출판노조활동에 관여하고 1933년 전협산하의 출판노조 관서지부를 결성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9월에 조선인민공화국 서울시 인민위원으로 선출되고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서울시 대의원과 민전중앙위원 및 서울지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 미군정에 안녕질서 위반혐의로 검거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남조선노동당결성에서는 의장단에 추대되고 후에는 총무부장이 되었으며 194년 3.22 총파업 직후와 8월에 미군정 경찰에 체포당하고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9월 최고인민회의에 남조선 대의원으로 참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상업성의 부상(남한의 차관)으로 재직하였으나 결국에는 1953년 남노당의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

부안의 김용술은 1917년 생으로 일제하에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금융조합에 다니다가 해방 후에는 부안군 공산당 청년동맹의 책임비서를 역임하고 3.22 ‘부안민주항쟁’ 때에 김태종과 이를 주도한 후, 월북을 시도하다가 복역 중에 6.25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여 부안군당에서 활동하고 9.28 수복 후에는 변산의 의상봉 깊숙한 절벽 본부에서 조직된 남노당 군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는 어려운 혁명활동으로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수복 후 친척과 친지 집에 은신하다가 체포되어 5년 형을 살고 석방된 후에 호민 신석갑의 사위가 되어 읍내에서 광문당이라는 서점 겸 문방구점을 경영하였고 서울로 옮겨 살다가 1981년에 65세로 병사하였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