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철교 위의 필사적인 도강 피난길.

한국전쟁은 전쟁 3년 1개월 만에 결국 휴전으로 종결되지만 전쟁의 참혹한 피해는 온전히 남북한 민중의 것이었다. 남북한 인구가 당시에 3천만이었는데 사상자는 무려 약 500만명으로 추계되어 남북 전체 인구의 6분의 1이 희생된 비참한 전쟁이었다. 쌍방의 전쟁으로 인한 직접사상자만 150만명, 전체 인명 피해가 약 280-319만으로, 부상자들만 360만이 파악되었다. 경제적 손실은 남한 산업시설의 반이 파괴되고, 제조업의 경우 전전 대비 42%가 파괴되었고 미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초토화된 북한도 공업의 60%, 농업의 80%, 광업의 20%가 파괴되었다.

1945년 8월은 감격과 환희의 세월이었다면 불과 해방 8년만의 1953년 8월의 한반도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민족내부의 전쟁이 모든 것을 삼키고 앗아간 폐허와 통곡과 상실의 공간과 세월이었다. 원래는 한국전쟁은 명분적으로는 '통일을 위해' 시작되고 발발된 전쟁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정권의 수뇌부는 '통일과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목표와 미명하에 전쟁을 발발하였다. 물론 이승만도 허황하게 전혀 현실적인 대책이나 준비나 수단없이 북진통일을 떠들어대기는 했었으나 이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공염불이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결과는 남북을 막론한 저들 통치자들의 최초의 의도나 명분과는 전혀 다르게 정반대로 민족분단을 철저히 고착화시키고 장기화시키고야 말았다.
1948년 남북의 정권이 각각 수립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민족의 영구분단이라기 보다는 분단정권일지라도 민족의 분단상태가 잠정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3년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되면서 한반도의 운명은 민족분단의 영구화, 고착화라는 거대한 덫과 굴레에 갇히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 1953년의 3년간의 전쟁에 이은 휴전은 남북한 공히 상상을 초월하는 민족 내부의 대립과 폭력적인 적대감과 증오를 키웠고 반면에 유구하게 지녀왔던 한민족의 고귀한 동질성과 민족의식마저 대립이념과 전쟁의 폭력과 잔혹성 속에서 상실되고 마비되고야 말았다.

냉전이념과 체제의 대리전쟁 6.25가 발발하여 피는 우리 민족과 민중이 흘리고 결과적으로 돈은 왜놈과 양키들이 벌었다. 전범국가인 일본과 독일이 경제적 잿더미와 정치적 폐허에서 일어서고 해방된 우리의 조국은 세계최대의 비참한 삶의 현장과 폐허가 되고야 말았다. 이같은 피해와 비극으로 누가 웃고 누가 행복하였는가.
전범국가인 일본과 서독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잿더미 위에서 급속한 경제부흥을 일으키게 되었고, 정치 군사적으로도 미,소 대립과 냉전체제의 상황에서 미국의 대소반공망을 구축하는 세계전략적 고려와 판도에서 일본과 서독을 아시아와 유럽의 미국의 대리역할 및 거점으로 재무장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한국전쟁특수 붐은 결정적으로 패전과 폐허상태의 일본을 한국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전쟁이전의 저들의 경제상태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런 기막힌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참으로 피는 곰이 아닌 수많은 한국민중이 흘려 죽고 돈은 우리의 원수였고 조선을 노예로 만들었던 왜놈들과 미국이 벌어 번영한 이 참담한 비극이여..!
  

이 땅의 소중한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들이 되었다. copy.

한국전쟁을 통해서 무수한 우리의 고귀한 무수한 피와 함께 미국과 16개 참전국과 중국의용군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간 큰 희생이 우리 땅에서 있었다. 그러나 냉정한 시각에서는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과잉생산된 저들의 무기와 식량이 판로를 잃으면서 공황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던 미국의 거대한 군수산업과 농업의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대단한 돌파구와 해결책이 되기도 했다. 전후에 미국정부가 저들의 막대한 잉여 농산물을 사들여서 한국에 무상원조한 것도 단순한 자선사업적 차원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미국의 국가이익의 차원에서의 깊고 강력한 내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은 오직 전쟁상인들만을 살찌게 한다.

6.25 전쟁 이후에 강화된 분단체제와 분단의식은 남북한 정권을 모두 독재적으로 강화시키는 구실과 상황이 되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전쟁으로 내면화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가의 보도와 같은 무기로 휘두르며 정치적 반대세력인 야당과 진보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의 최소한도의 기본권을 억압하며 자유당 독재 부패국가 체제를 운영하였다. 특히 종전 후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던 부역자들을 학살하거나 월북자들의 가족을 연좌제를 적용하는 등 극우반공체제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였고 이는 이승만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강력한 국가폭력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여기에 이승만의 충견노릇을 한 김창룡이 대장인 특무대와 경찰의 정권을 위한 주구화와 사찰업무가 강화되었다. 반공, 멸공통일만이 절대선이었고 구호였다. 전쟁을 통해서 남한 군대는 60만의 대군으로 성장하였다.
 

몽양 여운형과 대화하는 남노당수 박헌영은 북한에서 미제의 간첩으로 사형된다.

북한의 김일성도 전후 전쟁책임론을 제기하여 1952년 말부터 이승엽과 남로당의 간부들을 숙청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53년 휴전협정이 발효된지 얼마되지 않는 7월30일에 모두 미제의 간첩들로 몰아서 기소하고 결과적으로 박헌영 자신도 1955년 12월 15일에 기소하여 잔혹하게 숙청시키고 말았다. 사형을 당한 이들은 남로당수이며 외상 박헌영, 사법상 및 인공시절의 서울시인민위원장 이승엽,  시인겸 카프와 당 문화전선의 거물 임화, 베를린 대학출신으로 민전사무국장 출신의 이강국, 조일명, 배철, 백형복, 조용복, 소설가 설정식등이었다. 이들의 공식범죄혐의는 "미제국주의의 간첩과 공화국 전복음모혐의"였다. 그러나 평생을 나름대로 혁명과 신념으로 살아온 이들이 통틀어 집단으로 과연 미제의 한낱 간첩들이었을까? 이후 비단 남로당 계열만이 아니라 1956년 이른바 8월종파사건을 통하여 연안파의 거두인 무정장군도 전쟁의 책임을 물어 숙청하고 김두봉과 연안파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후에는 소련파도 몰락시키고, 이같이 자신의 반대파와 경쟁세력을 숙청한 후 김일성은 권력을 집중 강화시키고 반미항전은 전후의 연속선에서 김일성 체제를 강화하는 강력한 통치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6.25 전쟁은 민족통일이 아니라 1950년 이후에 강력하게 전개된 미,소의 냉전체제 및 세계사적인 이념대결과 진영대립의 세계체제 속에서 오히려 민족분단을 더욱 고착화 장기화 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사회 문화적으로도 6.25전쟁은 큰 변화를 불러왔다. 남한에는 상이군인들과 남편과 부모를 잃은 수많은 미망인들과 고아들이 넘치게 되었다. 특히 해방후에서 휴전후 8년기간의 북한을 탈출한 동포들은 약 14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였고 또한 농촌의 농민들이 전후 피폐한 삶에서 먹고 살 것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북의 거대한 이산가족들이 발생하였고 인구이동으로 과거의 농촌공동체와 대가족제도와 촌락공동체적 인간관계가 크게 훼손되고 변화되었다. 특히 이북에 있던 반공 유산계급세력은 모두 남하함으로써 건강한 견제와 균형의 정치집단과 세력이 거세되거나 없어지고 남으로 온 북한의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대체로 기독교세력은 남한의 새로운 강력한 반공기독교와 극우 보수정치집단의 첨병이 되고야 말았다. 국우 전투적인 서북청년단은 이승만과 보수반공기독교의 강력하게 결합되었다.
또한 미국의 강력한 군사, 경제적 원조체제 속에서 아메리칸 드림 및 숭미주의와 영어열풍 및 땐스바람과 헐리우드 영화의 보급과 팝송 등의 미국문화- 미국식 대중문화들의 범람이 이루어지고 전통사회의 미풍양속에 혼란이 크게 초래되고  전통적 가치규범과 전통문화의 훼손이 크게 이루어졌다.
 
부안에도 6.25 전쟁 3개월간 북한의 인민군이 점령을 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노동당 부안군당 인민위원장에는 초기에는 이용기였고 그후 당위원장 선임은 8.16일에 당시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있던 시인 신석정의 주도로 부안읍 동중리의 부안극장에서 각 리의 대표 200명이 모여서 인민위원선거가 이루어지고 군인민위원장에 허영철이 선임되었다. 시인 신석정은 지난 호에 소개된 동진면 당상리의 최순환과는 부안초등학교 동기동창 관계이기도 했고 김태종과는 절친이자 우애 깊은 문우였다. 신석정은 3 개월간의 인공치하에서 부안인민중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다. 아마도 신석정 시인의 전후에 고향 부안을 떠나서 살아야했던 어려움은 이러한 행적들이 당시에는 험하게 부역행위로 몰리는 상황에서 연유된 것으로 파악된다. 부안에서 11중대 약 1000명 정도가 선발되었던 의용병들은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의 투여를 위하여 도보로 부안을 출발, 전주사범학교에서 집결한 후 완주의 송광사방면으로 갔었으나 인민군의 전체적인 후퇴상황에서 강원도 김화에서 만나는 것으로 명령이 내려져 산개되었다. 김형주 선생에 의하면 그 자신 군번도 총도 없이 신탄진 방면에서 올라가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생존할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부안에서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나서 인민군 전체 사기와 현실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부안군 인민위원회에서는 그간 경찰과 그 가족들, 우익 인사들을 체포해서 내무서에 가두고 있었다. 9월 27일 밤에 부안의 정치보위부 간부와 내무부 간부들이 퇴각하여 정읍 내장산으로 들어가 입안면의 산성에서 빨치산 사령부를 조직하고 부안책임자는 이용기가, 선전부장에 김용술이 맡았다. 그리고 인민군이 부안에서 퇴각하던 날에 백산면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가두었던 이들을 학살했다. 특히 군애국투사후원회장이었던 신호근은 조부, 아버지와 본인이 모두 백산면 공동묘지에서 학살당했다. 이어서 국군의 점령과 함께 다시 피의 보복이 있었다.
부안 3.22사태로 지명수배가 되었던 김태종은 상경하여 숨어있다가 월북을 하였고 6.25 전쟁발발 후에 전라북도 정치보위부 책임자로 전주에서 활동하던 중에 9.28수복 후에는 월북의 길이 막혀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을 하다 1952년 7월 21일 덕유산 백련사 계곡에서 토벌대에 사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김태종의 동생 김태안도 하서면 월포에 살다가 변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하산 중에 처가에서 토벌대에 체포되어 1951년 3월에 사살되었다.
이같이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신호근과 김태종의 가정을 보아도 6.25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참사를 불러왔는가는 말할 나위도 없다. 전쟁 속에서 사람의 목숨은 한낱 파리목숨들이었다. 인민군이 부안을 떠난 다음에 국군 방위군이 편성되고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밤이 되면 빨치산과 방위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곤 했다. 1950년 10월과 11월 사이에 변산에 야산대로 입산한 이들은 약 1000명에 이르고 주민들까지 합산하면 수천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은 그 후 2년 반 동안에 군과 경찰의 토벌로, 특히 빨치산의 중심이었던 지리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53년 9월의 죽음으로 소멸하였다.

분단민족과 체제 및 6.25 전쟁의 슬픔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최인훈은 황금만능의 부패한 남에도 혁명의 이름으로 당권력체제인 북에도 소속되거나 만족할 수 없던 청년지식인의 고뇌와 전쟁의 비극과 허망함을 극명하게 그의 작품 <광장>을 통하여 다루었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전쟁포로로 송환당할 때에 중립국을 선택하고 결국 바다에 빠져 죽는다. 신념이나 이상이 다른 것으로 인간의 생명을 허망하게 그렇게 집단적으로 살해한 전쟁의 광풍이 3년을 끌다가 결국 휴전이 되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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