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많이 사랑했다. 딸에게 레이스 달린 예쁜 원피스를 입히고, 구하기 힘든 구두도 신겼다. 딸이 아프기라도 하면 세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인 전주의 병원까지 데려갔다. 지금 얘기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김태종(金泰鍾, 1911~1952)의 가족 얘기다.
  현재 보는 사진은 김태종이 탄금재(彈琴齋)라 불리는 자신의 정원에서 딸 혜원을 찍은 것이다. 이곳에는 자작나무, 능소화, 히야신스, 튜울립, 목련도 철에 따라 피었다. 목련은 당시 부안에서는 읍사무소와 이 집 정도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민들이 사진 한 장 찍기도 쉽지 않았는데 김태종은 집에다 암실을 만들어놓고 사진을 인화했다. 가깝게 지낸 부안의 시인 신석정의 사진 상당수도 김태종의 손을 거쳐 인화된 것이다. 그가 일본에 자주 간 것은 새로운 카메라를 구입하고 사진 인화지도 사기 위함이었다.
  김태종의 호는 김아(金鴉, 갈까마귀아)다. 부안읍의 동문안 그가 살던 집은 ‘신문사집’이나 ‘묵은 기와집’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고 부유했다. 그는 별을 연구하였기에 천체관측을 위한 만원경도 가지고 있었다. 자녀 이름도 둘째는 성(星, 별성), 막둥이는 선(璇, 별이름선)으로 지었다.
  해방 후 민선 부안읍장으로 살던 그는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소지주요 생활이 넉넉함에도 친일파 청산과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큰 흐름에 동승한 것이다. 1947년에 24시간 총파업인 3·22 사건이 부안에서 일어났을 때 책임자가 되어 활동했다. 이 일 후로 지하 비밀조직이 드러나고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다. 그는 동진의 친척집에 은신하여 경찰의 눈을 피하다가 부안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깊은 밤에 느닷없이 집에 들러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일이 잘못되면 사진관이라도 하겠다는 얘기도 남겼다. 집을 나서기 전에 두 살짜리 막둥이 딸이 쌔근쌔근 자는 모습을 봤다. “야는 왜 이렇게 미웁게 생겼당가”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에 대한 반어법의 사랑 표현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어린 딸을 키우면서 혼자서 겪게 될 고생에 대한 미안한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이때 집을 떠난 그는 다시는 부안에 돌아올 수 없었다.
  가장이 떠난 뒤 가족들이 겪은 어려움이야 무엇으로 말하랴. 둘째 딸은 미술가로 셋째 딸은 시인으로 아버지의 예술 열정을 물려받았다. 막내 딸 김선은 제 1회 부안문학상을 받으며 인사말에서 아버지를 언급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화두는 아니어도 근원은 항상 그리움이었어요. 시를 쓰면서, 제 가슴 속에 한 맺힌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김아’ 저의 아버지께 수상의 영광을 바칩니다. 고맙습니다.
-2015. 12.29 김선

  한국전쟁이 나자  김태종은 정치보위책임자로 전주에 왔었다는 얘기가 전할 뿐이었다. 퇴로가 막히자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토벌대에게 사살되었으니 1952년 7월 22일이다. 가난한자들에게 소작료를 줄여주고, 자신의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었으며, 하서의 월포 해변가에 면한 땅들은 동네에 기증했다.
  혁명을 꿈꾸며 평등을 실현하려던 김태종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그런데도 그를 공부하지 않으면 부안 현대사의 한 부분을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김태종에 대한 증언을 들을 때마다 민중해방에 앞장 선 남미의 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1967)가 생각난다. 한국전쟁 70년이 가까워진 요즈음도 부안에서는 김태종에 대한 얘기가 금기처럼 빗장이 걸려 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지상의 아름다움을 담던 그의 사진에는 사상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김아의 정원 탄금재(彈琴齋)는 ‘거문고 타는 집’이라는 뜻인데 현재는 집과 정원은 사라지고 집터만 남아 있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