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으로 고통당한 수많은 피난길의 민중.

일찍이 천재적인 독일의 군사전략가 폰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전쟁론>에서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정치”임을 설파했다.

어떤 점에서는 1948년에 두 개의 전혀 이념과 체제가 다른 남북한의 두 정부가 수립되고 한민족이 사실상 분단이 되면서 1950년 6월의 민족 내부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민족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좌우합작의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몽양 여운형도, 백범 김구도 암살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1948년 8월과 9월에 두 개의 남북 정부가 수립되고 치킨 게임처럼 그렇게 전후 미소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와 이념의 대리전을 남의 이승만 정부나 북의 김일성 정권이 우리의 조국 한반도에서 모두 충실히 감당할 성격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비극적 민족 내부의 전쟁을 막을 제어력은 이미 상실당한 것이었다. 동양의 천재 전략가 손자도 원래 전쟁은 피를 흘리며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 진정 지혜로운 승리의 길임을 설파하였는데, 이미 한반도의 혁명과 정치에는 이런 최고의 정치와 전쟁의 철학적 경륜과 수준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남한 정권 생존의 여탈권을 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6.25가 발발되기 전에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이 이끄는 남한의 경제사회적 문제는 심각했다. 원래 해방 직후, 미군정에 접수되었던 일제의 적산 귀속재산 중에 주요사업체가 총 3551개였다. 미군정은 이를 공업생산이 격감하고 대량실업이 발생하자 귀속재산 불하를 시작했다. 그래서 미군정기간 동안에 기업체 513건, 부동산 839건, 기타 916건이 처리되고 나머지는 1948년 9월에 이승만 정권에 양도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도합 처리한 귀속재산은 무려 33만건에 달하는데 이 처리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부정 부패가 저질러졌다. 예를 들면 1947년 시가로 30억 원 가치로 평가되던 한 방직공장을 정부는 7억 환으로 불하했고, 그것도 7-15년동안 거치 상환하도록 했으니 당시의 인플레의 천정부지를 고려하면 이는 사실상 무상에 가까운 수준의 처리였던 것이다. 이런 착복과정을 거쳐서 정권과 결탁하여 자본과 설비를 소유하고 축적해간 남한의 자본가들은 더욱 부패한 이승만 정부와의 양자간의 결탁을 강화해가면서 민중의 이익과 중소기업의 온전한 발전을 배제한 관료 자본으로 성장하여 갔다. 이같은 무원칙한 적산의 처리와 부패 무능한 경제 사회적 현실과 함께 친일파 민족반역자세력의 처리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서 민중들의 미군정 및 남한 정부에의 불만이 대단한 현실이었고 이것이 민중생활의 도탄으로 이어져 사회적인 크고 작은 소요와 항쟁으로 분출되고 폭발되었다.

이에 반하여 남한에서의 경제적 대혼란과 무능 부패한 현실에 반하여 북한에서는 소련군정의 배후와 북한인민위원회의 정책에 의하여 친일반민족세력의 처단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토대 위에서 당시에 북한의 경제력은 급속히 향상되어 있었고 이미 1949년에는 해방 전에 비하여 경제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경제력의 배경 속에서 북한은 1948년에 인민군을 조직하고 소련의 무기지원을 받아 중무장을 했다. 나아가 1949녀에는 소련 및 중공과 군사협정을 맺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은 13만 5천명의 병력과 탱크 150대, 대포 600 문, 비행기 196대, 해군 함정 30척을 6.25발발 당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한은 도합 8개 사단에 10 명 정도의 병력에 무기수준은 38도선 부근의 5개 사단에만 MI 소총과 일본제 낡은 99식 소총이 지급되어 있었다. 장갑차와 대포도 몇 대 안되며 그것도 낡아빠진 것이었고 탄약이나 연료도 충분치 않았다. 공군에서도 전투에 쓸 수 없는 연습기만 겨우 20여 대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남한 정부는 북한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으며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필요한 대책이나 조처를 취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힘도 없었다.

서울에 입성하는 북한 인민군.

이같은 6.25발발 직전에 있어서의 남북 군대의 상황과 조건이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의 공군력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비현실적으로 지니고 있었고 하등의 객관적인 정확한 남북 군사력의 파악이나 준비없이 오히려 북진통일론만 허황하게 떠들어 구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해방 직후부터 북한의 전력을 착실하게 강화한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고 스탈린에게 전쟁승인을 요청하면서 '북한이 공격하기만 하면 남한에서 반란이 일어나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을 장담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마침내 1950년 3월에 김일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의 이른바 애치슨 발언이 나왔다. 그 내용은 미국의 방위선이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잇는 선으로 되어있음을 선언하면서 그 내용에는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언과 태도가 북한의 남침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까?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의 대포들이 38선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명령으로 전쟁을 개시하며 남쪽을 공격하여 왔다. 원래 북한은 개전이 시작되면 단 2주일이면 부산까지 완전히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을 하였다. 당일 오후 2시에 경무대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리고 국무총리를 겸임하고 있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북한군이 남침을 해왔으나 국군이 용감하게 이를 맞아 잘 싸우고 있다고 보고하고 '서울에 대한 국군의 방위도 철통같다'고 보고했다. 이승만은 결과적으로 자신은 서울시민을 허위로 안심시킨 일종의 사기행위처럼 6월27일 새벽 3시에 비밀리에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에 입성하는 북한 인민군.

파죽지세로 남한 전역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전쟁 발발후 불과 3개월 만에 낙동강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놀란 미국이 유엔을 움직이며 참전국들을 조직하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9월28일에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나아가 미군과 국군과 유엔군들이 평양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의 국경지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아예 이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하고 승리를 목표로 삼으려 하였으나 트루먼의 결단으로 세계3차대전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맥아더의 해임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한국전쟁의 중국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중국을 1949년에 공산혁명으로 석권한 모택동과 지도부는 1950년 10월에 항미원조라는 이름으로 중국의용군을 유능한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투입한다. 결과적으로 모택동의 친아들 모안영이 전쟁 속에서 폭사하고 수많은 중국의용군들이 소위 인해전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으나 중국군대의 조선출병으로 전선은 다시 38선 이북은 공산군이 점령하는 현실이 되었으며 휴전선을 놓고 피아의 끝없는 공격과 방어가 점철되며 6.25전쟁은 이제 바야흐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최초의 국제전쟁의 성격으로 비화되고 확대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평양과 흥남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더 나아가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철수하고 오산까지 후퇴하다가 겨우 3월 14일에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다.

남북의 분단체제와 비극을 소설 '관장'으로 형상화한 작가 최인훈.

6.25전쟁은 남북한이 전쟁상황에서 수차례나 각각 그 점령상태가 교차됨으로써 전투와는 상관이 없는 민간인들의 학살과 처형과 굶주림과 고난들이 너무도 처절하게 비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최초의 전투요원 말고의 피해는 6.25전쟁 발발과 더불어 2개월간에 국민보도연맹에 속한 20-30만 중에서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2만명이 학살되었다.6월 28일에서 7월 17일 사이에 대전형무소 재소자중에 보도연맹 1800 명이 살해되었다. 1951년 2월에는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300어린이들이 포함된 719명의 무고한 양민이 학살되었고, 3월에는 소위 ‘통비분자’ 소탕의 구실로 지리산 부근의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950년 7월에는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의 a무차별 폭격에 의한 주민 177명이 희생되고 5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부안에서는 해방 공간에서 반탁열기가 강한 탓으로 공산당 주도하의 찬탁운동 전개는 현실적으로 매우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기층민중 속에서 조직은 강했던 부안의 남로당이 당중앙의 신전술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무리한 관민항쟁으로 이끈 부안 3.22투쟁 이후에 사실상 부안의 좌익세력은 궤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른바 '3.22 민주항쟁사태'에 이어서 부안에서 1948년 2월 7일 이른바 2.7구국투쟁이 이루어졌다. 이는 유엔선거감시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부안군당도 3.22사태와 미소공동위 추진투쟁을 거치면서 기왕에 파괴된 조직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 2.7투쟁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2.27투쟁으로 이어졌다. 1948년 2.7투쟁의 전개 속에서 야산대가 조직된다. 그러나 이 당시의 야산대는 본격적인 무장유격대는 아니었고 단독정부수립반대. 인민공화국 지지투쟁 등의 당활동을 지원, 보장하기 위한 자위적 성격과 수단 쪽이었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좌익세력이 산에서 온전히 활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야산에 대한 대대적인 벌목을 실시하고 야간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산간 마을사람들은 평야지대로 소개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 북으로부터 무기의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1948년 11월과 49년 3월에 걸쳐 무려 6000명의빨치산들이 사살되었고 그 이후에도 진압작전으로 야산대는 많은 사망자를 내고서 1950년 5월과 6월 사이에는 유격대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부안일대의 보도연맹은 장기수 허영철에 의하면 8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했다. 특히 부안 줄포면 후촌 야산의 일명 '40고라당'으로 불리우는 골짜기에서 41명이 학살되었는데, 김형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보리 40-50가마 상당액인 5만 원을 쓰면 사십고라당 골짜기로 싣고 가다다 경찰이 내려주었다 했다.  또한 개암사 부근의 개암동 골짜기에서도 100여 명, 운호마을 입구의 여룬개 골짜기에서도 30명 이상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6.25 발발후 부안의 천여 명 의용군을 관할한 부안김씨 제각.
6.25 전 부안군 남노당 위원장 김태종은 전쟁중 덕유산에서 사살된다.

부안에 인민군이 입성하는 것은 7.19일이었고 군청 옥상에 인민공화국 깃발이 나부꼈다. 만경강을 방어선으로 구축했던 경찰들은 인민군들의 탱크와 따발총을 앞세운 공격에 모두들 도망치고야 말았다. 새롭게 부안군당 인민위원장에는 이용기가, 선전부장에는 훗날 장기수로 유명한 허영철이 임명되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안에서도 대대적인 인민 의용군 모집이 이루어져서 보통 1개면에서 1중대가 꾸려져서 1읍 9면이던 부안군은 부안읍에서는 2개 중대로 도합 11중대 약 1000명 정도가 선발되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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