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3월 초에 보안면 만화동의 고인돌을 찾아 나섰다. 영전사거리에서 곰소를 향해 갈 때, 만화교를 건너 왼쪽 뚝 길을 택하여 20m 쯤 가면 고인돌 두개가 보인다. 이 만화동 앞 도로를 여러 차례 지났지만 고인돌을 부러 찾지는 못했다. 그동안 미루었던 것은 ‘그 큰 돌을 누가 가져가겠어?’ 라는 생각을 했는데, 농사짓는 사람들은 큰 돌이 논이나 밭에 떡 허니 버티고 있으면 농사짓기도 힘들어 기계를 이용해서 없애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고인돌을 찾는 것은 거대한 돌덩어리를 만나는 일이다. 이것은 엉뚱한 곳에 자리한  흔한 돌을 보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사인들은 왜 거대한 돌덩이를 굳이 이곳에 옮겨놓았고 어떻게 운반했는지, 그 돌을 무엇에 썼는지를 생각하며 바라본다면 달리 보인다. 고인돌은 청동기인들의 무덤일 뿐 아니라 제의의 대상일 수도 있으니까.
  만화동 고인돌은 길이가 5.82m 폭이 3m 두께는 1.9m이고 4개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옆에 것은 약간 작고 3개의 굄돌과 그 위 덮개돌은 한쪽으로 기우러져 있다. 이곳 고인돌은 땅 속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놓고 받침돌을 괴는 남방식이다. 주변에 천마산이 있으니 돌을 떼어낸 채석장의 흔적이 있는지 답사해 볼 예정이다.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면 만화동 일대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오래된 마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을도 기상이나 전염병, 사회적인 이유로 부침을 계속했을 것으로 본다면 청동기 때부터 이어진 마을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언제부터 고인돌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후 청동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 후에 고인돌이 만들어지고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는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움무덤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현재 발견되는 고인돌의 시기를 아무리 가깝게 잡아도 2,200년은 넘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한반도를 ‘고인돌의 나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세계에서 발견된 7만 여기의 고인돌 중 4만 여기가 국내에 있기 때문이다. 바위산이 많아 거대한 돌 채취가 가능했을 뿐더러, 고인돌 축조가 가능할 만큼의 인력과 지배력을 갖춘 부족국가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안지역에 고인돌이 몇 기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연적으로 무너지고 농경지나 집터로 이용되면서 훼손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부안여고의 동아리 ‘얼아로미’ 의 『1998년 향토답사 보고서』에서 학생들은 만화동 주변에서만 11곳의 고인돌을 조사하여 소개했다.
  이곳 만화동과 우동리는 고인돌, 반계 유형원 유적지, 부안김씨 고문서 등이 있는 역사 마을이다. 변산을 찾는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데, 이런 곳을 다녀갈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고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부안 사람들의 몫이다. 여행자들은 작고 친절한 손길에도 감동하고 추억을 쌓아가며 입소문을 낸다.
  반가운 봄비가 소학교 친구처럼 찾아오는 아침에, 2,000년 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고인돌을 그려보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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