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레인과 벌목으로 가히 훼실 위기에 처한 지운 김철수 만년 25년 숨결이 있는 이안실 풍경.

부안이 낳은 민족독립투사이며 혁명가 김철수는 부안과 전북을 뛰어넘은 큰 인물이었다.

초기 사회주의와 고려공산당활동과 조공 당수도 뚜렷한 민족운동의 족적이었고 그 결과 김철수의 일제하의 수형기간은 무려 14년에 달한다. 이같은 그의 고난은 일제하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운동가들의 전체 수형기간을 통털어서도 최고의 수위급에 속한다. 참고로 조선공산당의 창당 동지인 죽산 조봉암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7년의 선고를 받아 신의주감옥에서 복역한 후 역시 전향을 거부해서 예비구금으로 해방 때 까지 복역하며, 남로당의 박헌영의 경우에는 일차는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광인행세를 하여 해외로 탈출하였지만, 2차 해외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체포된 후에는 징역 4년을 복역하고 나와서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극노인 시절에도 늘 청청한 꿈과 신념을 견지한 지운 선생.

제2차 조선공산당이 1926년 6.10만세 사건으로 인하여 대대적으로 검거되고 붕괴됨에 따라서 조공당의 재건과 조직의 강화문제는 조선혁명과 그를 위한 모든 투사들의 최대의 문제가 되었다. 사실상 1925년의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에도, 조선혁명운동의 전위세력의 단일화 통일문제는 중요세력이던 화요계와 서울계 양파의 지도조직의 합동에 대한 비밀공작이 전개되었지만 온전하지 못하고 화요계 주도로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세력 내부의 부대로서는 서울파계의 다수의 단체와 투사들과 재일진영의 지도단체인 일월회와 만주의 공청세력 일파와 북경의‘혁명의 길’일파들이었다. 그런데 아쉬움이 크던 이들 세력들이 1926년 9월경에 드디어 양파 세력의 합동을 실현하게 되었고 동년 12월 7일 현저동에서 김철수 소집으로 제2차당대회를 소집, 양파 조직합동의 실현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신간회 창립 총회.

이것이 세칭 통일공산당으로 불려지고 혹은 맑스 레닌의 이니셜을 딴 M·L당으로도 호칭된다.
이 당은 당대표 김철수와 공청대표 고광수, 김강을 모스코바의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보고케 하고 국제 코민테른당은 이와 같은 조공당의 역사적 합동을 격찬하고 당을 승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통일당이 결성되고 출현한 이 후에 국내의 중앙과 지방, 일본과 상해와 만주에 각 지부를 두고 활동을 강화하면서, 당의 통일적 지도하에 조선사회의 대중운동이 일대 고양 발전하게 되어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와 여성조직인 근우회등을 조직지도하게 되고 노동자 농민 청년운동 등의 대중단체등을 정리 지도하고 종래의 모든 운동상의 파쟁상태를 지양 청산하고 종래의 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을 제창하고 혁명적 이론을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조선의 사회운동은 자연성장적 단계를 지나 바야흐로 목적의식적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제의 극심한 조선사회운동과 특별히 조선공산당에 대한 무서운 탄압으로 김철수의 뒤를 이은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으로 이어진 제3차 조선공산당이 활동하다가 1927년 2월과 8월 양차에 무려 1천 여명의 다수의 당원들이 검거로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되며 이에 차금봉의 제4차 조선공산당이 출현한다.

김철수는 모스코바의 국제당에 당대표로 파견되어 제3차공산당의 승인을 받은 1927년 5월경에 다시 귀국한다. 그는 3차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위하여 멀고 먼 모스코바로 파견되어 이를 성공시켰으나 후에 M·L당의 파당성과 전횡이 알려지면서 당을 저 유명한 코민테른의 ‘12월테제’와 함께 해체하였다. 그리고 김철수는 1929년 3월에 만주의 길림성 돈화현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맡았으나 1930년 1월 서울에 도착, 활동중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하게된다. 이 사건을 맡았던 가인 김병로가 담당 변호사로, 1심판결의 선고를 받자 김병로가 항소를 하자고 김철수에게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수는“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항소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김철수는 형무소생활을 마치고 1938년 10월에 출옥하였으나, 1940년 여름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들의 전향자 단체의 강제가입에 거부함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1945년 8.17일 조국 광복을 맞을 때 까지 공주형무소에서 41명의 정치범들과 그의 생애에 도합 14년의 수감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평생을 독립운동가와 혁명가의 딸로 고난과 헌신의 삶을 살다

금년 2월에 별세한 김철수의 따님 김용화.

지운 김철수는 1986년 3월 16일에 94세의 일기로 그의 파란만장한 풍운의 삶을 마치고 서거하였다. 전남대의 불교대학생들의 초청에 응하시던 지운선생은 갑자기 쓰러져 전남대병원에 입원 중에 사망하였으며 대수리 선영에 모셔졌다가 2005년 국가의 건국포장 애국장 서훈 이후에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 신문이 배포될 금요일 3월 16일은 지운 선생의 32주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자칫 이번 32주기는 따님 김용화님이 지난 금년 2월에 별세함으로써 참으로 매우 적막하게 지나갈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이래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고 생각된다. 김철수의 기일에는 적어도 부안의 전 관민들은 못되어도 뜻있는 이들이 지운선생의 삶과 유지를 마땅히 기리고 선양해야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우리 부안이 낳은 걸출한 이 땅의 진정한 큰 독립지사에 대한 최소한도의 예의와 의무라고 생각되어진다.

김철수 선생은 원래는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할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민족독립과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집안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백산에서 초기 전위적 농민운동을 하였고 남로당 부안군당 책임을 맡았던 김복수 아우와 이북에서 부상까지 지냈다는 아우 김광수는 두 아들 용일과 용덕과 함께 모두 일찍 월북했고 선생이 감옥에서 사윗감으로 점지한 기층 노동자출신의 막내 사위 이인기는 남로당 전북도당의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역시 월북, 생사 불명이고, 일본 명치대학을 다니던 큰 딸 금남은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대학을 중퇴하고 돌아와 이 사건에 뛰어들었고 해방 후 여순반란사건에 남편과 같이 관여하여 남편이 총살되고 본인은 이 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과 병으로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 김철수 선생의 슬하의 5 남매 중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 생전의 부친을 수발, 효도로 모시고 역시 아버님을 닮은 열혈투사이던 언니의 자녀들까지도 하서면의 돈지에서 약종상 삼성약방을 운영하며 독신으로 부양했던 막내따님 김용화도 금년 2월에 사망, 고인이 되어 막상 대전 현충원의 지운선생 묘역도 참으로 적막, 쓸쓸할 수 밖에 없다.

이안실 내부.

마침 취재를 위하여 지운 선생이 노년에 오랫동안 기거하셨던 백산면 대수리 일명 수탱이 마을의 이안실을 백산고교 정하영 교장과 함께 무려 35년 만에 방문하였던 필자는 감회보다 나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안실과 지운선생의 체취가 어려있던 선산의 모든 분위기와 풍경이 살풍경하게 포크레인과 각종 기계들에 의하여 정신없이 파헤쳐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정하영 교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운선생의 선산이 아마도 손자인 고 소중씨와 자손들에 의해 타인에게 안타깝게 매각이 되고, 그나마 선산을 매입한 사람이 이안실의 의미는 존중하여 훼손하지 않겠다고 언명했었다지만, 지운선생의 25년간의 마지막 삶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안실의 훼실 가능성은 참으로 경각에 달려있는 긴박한 상황이지 않을 수 없게 보인다. 현실적으로 부안이 낳은 독립, 혁명운동의 최대의 인물로 이제는 공식적인 대한민국건국 애국장의 서훈까지도 받은 애국지사 겸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온 생애를 다 바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삶을 마땅히 크게 기려야할 부안의 지방자치단체의 군수와 군청 및 지운선생기념사업회의 활성화와 부안군민들의 각별하고 비상한 전관민적인 예우와 대책이 요구되는 참으로 엄중한 상황이다. 지운 김철수에 대해서는 혼란스럽고 착잡하기 그지없었던 해방공간에서도 다시 그의 존재와 의미가 한 번 언급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김철수의 제3차 조선공산당은 기왕의 파벌을 운동에서 지양하고 또한 대중 속에서의 실천역량을 제고하는 한편 보수 우경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철저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통합적 민족운동을 시도하여 1927년 2월 15일에 마침내 서울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민족운동의 원로 월남 이상재를 회장과 임꺽정으로 유명한 진보적 작가인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선출한 신간회는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동원하고 집결시킨 항일단체였다. 중앙본부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우세하고 각 지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우세하고 활발하였던 신간회는 1929년에 집행부도 진보적인 변호사 허헌을 위원장으로 새로 선출하면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새롭게 적극 포진하였다. 그리고 이후 신간회는 1929년의 유명한 원산총파업, 전남의 암태도소작쟁의, 함남 단천의 산림조합시행령 반대 등 많은 사회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반일 정치투쟁을 선도하였다. 또한 신간회는 1929년 11월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을 3.1운동처럼 전국적이고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12월 13일의 민중대회를 은밀하게 준비하였으나 일제가 이를 감지하고 허헌과 간부진들을 미리 검거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에 지회 100개를 돌파하고, 1931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무렵, 전국 126개 지회에 회원이 무려 4만 여명에 이르렀다. 참으로 신간회는 빛나는 항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통합운동이었다.

혁명가의 표상처럼 영원한 초봉처럼 '외롭고' 높은 추상같은 뜻을 담은 지운 유묵.

부안의 신간회지회 부회장은 독립운동가인 임종한(1906-1941)이 맡았다. 그는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 전북연맹의 간부로 활동하며 같은 해에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으로 조직된 고려공산청년회 부안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8년 3월 25일 신간회의 부안지회 부회장으로 민족운동에도 앞장섰고 같은 해 8월 전에도 소개된 바 있는 소작농의 권익을 옹호하고자 농민운동을 전개하고 백산노농회의 간부로서 농민조합을 결성하려다가 체포되어 1년 여간 고초를 치렀고 1929년 9월 28일에 고려공청사건으로 구속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2년을 구형받고 결국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처벌을 받았다. 그의 이같은 공훈을 기려서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안지회 총무는 우리에게 유명한 고 신석정 시인의 3살 위의 형인 신석갑(1904-?)이었다. 그는 부안에서 고매한 인품과 문필이나 특별히 효도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한의학을 배워 명의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가 운영한 옥성당 한약방은 뛰어난 의술과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따뜻한 인술로 이름이 높아 항상 붐비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석갑은 철저한 배일사상으로 불복종하며 창씨를 거부하고 집안 내부에서도 모두 일체의 공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신간회 조직과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항상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있다 하여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의 혼란기에도 좌경 진보적인 인물로 지목되어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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