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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의 여성활동가 김용화 선생을 추모하며1

김용화 선생은 1919년 11월(음력)에 부안군의 농촌마을에서 소지주의 손녀로 태어났다.      

부친(지운 김철수<遲耘 金철洙>,  2005. 8. 15일에 대한민국정부의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음)은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과 전문부 학생으로 재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뜻을 둔 6명의 학생 동지들과 열지동맹(裂指同盟 : 손가락을 찢어 낸 피를  섞어서 돌려 마시는 의식)을 맺고 중국어반 학생들과 함께 약소민족들이 동맹해서 일본을 때려 부수자는 반제동맹(反帝同盟) 결성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에는 열지동맹을  맺은 친구 정노식에게 독립운동자금 3천원을 보냈으며 이 해  동짓달에 태어난  둘째 딸(3남2녀 중 넷째) 용화의 충생신고는 3 · 1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3월 1일로 하였다.    이후 1920년 선생의 부친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리 이동휘 등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결성하는 등 만주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활동과 국내에서는 상해파로  활동하였다.
 
부친은 박헌영이 책임비서로 있는 일제하 마지막 공산당 서클인 ‘경성컴클럽’에서 인쇄소들과 출판노조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청년을 둘째 딸 용화의 배필로 정하였다. 1939년 21세의 나이로 이복기(李福機 1919년 생)와 결혼을 하였다. 다음 해에 남편이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는 동안 선생은 취직을 하여 번 돈으로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주로 책을 많이 사서 들여 보냈다. 이복기는 1945년 6월 15일에 함흥형무소 사건으로 서대문 경찰서에 피검되어 5년간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어 있다가 1945. 8. 15일에 해방과 더불어 풀려났다.
함흥형무소 사건이란 1934. 5. 1일에 형무소 안에서 사상범 7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메이· 데이] 행사를 했고, 1935년 흥남, 안변, 함흥에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의 이름으로 「삐라」살포, 1937년. 4. 30일에는 함흥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상범 35명이  [메이· 데이] 기념 만세소동을 벌인 것 등이다.
이복기는 해방 후 1948년 전주에서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북 도경찰에 수감 중 탈출하여 잠복 중에 월북했다. 왜 어떻게 월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순사건’ 직후(1948. 10월 말~11월 초)에 월북한 것으로 선생은 기억하고 있다.
1947년  3 · 1 운동 기념일에 서울 남대문에서 좌 · 우익 충돌사건이 있었고, 3월 22일의 「24시간 파업」운동으로 미군정은 이 해 8 · 15 행사를 취소시키고, 8. 11∼14일까지 좌익폭동의 미연방지를 위해 수천 명을 검거하였다. 이 때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체포되었던 선생은 매를 맞고 전기고문을 당하였다.  몸에 전기를 연결하고 전압을 점점 올리는 고통 속에서 “이 놈들아 차라리 총으로 쏴 죽여라”고 소리쳤다. 본인도 모르는 사람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다. 1948년에 남편은 북으로 갔는데 조직에서 보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부부간에도 일에 관한 것은 서로 묻지도 알리지도 않는 것이 조직원들의 불문율이었다.
남편이 북으로 간지 반년쯤 지나서 선생도 북으로 가서 함흥에서 남편과 같이 지내다가 1950년 전쟁 때에 남으로 내려왔다. 남편은 전쟁 시작 전인 6월 10일에 내려왔으며 오래지 않아 붙잡혀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중에 소식을 모르다가 수소문하여 1951년 1 · 4 후퇴 전에 서빙고 부근에서 처형된 사람들 속에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나 살아서 북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으나 북에서 1953년에 남로당 간부들을 숙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던 남편도 처형을 면할 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되어 그때부터 남편을 죽은 사람으로 아주 단념했다.
두사람 사이에 아기가 없었으므로 자녀도 없고 돌바줄 사람도 없어 2005년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좌익활동을 하다가 남쪽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처럼 선생도 암흑같은 세월을 견뎌야 했다 본인 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30여 년간 지속되었던 연좌제로 삶이 완전히 망가지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까지 출세에 걸림돌이 되었다. 민청(북조선민주청년동맹) 조직부에서 활동했던 둘째 오빠는 전쟁때 북으로 갔으며 언니(김금남)는 결혼하여 시집간 곳인 전북 김제군에서 인공시절(1950년)에 여맹 위원장을 했다. 그를 따르던 여맹원들이 많았으며 좌익활동이 비합법이 되었을 때부터 서울로 가서 살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진 여맹원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빚에 쪼들리다가 1956년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다음주 2회가 이어집니다.

엄영애
한국여성농민운동사 저자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
전 전북여성단체연합 상임의장

엄영애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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