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素齋) 김형주(金炯珠, 1931~ ) 선생은 부안을 뜨셨다. 부안에는 조상들의 선산이 있고 이곳에 오래토록 살기위해 한옥까지 지었지만 떠나셨다. 노부부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고 돌봄 없이 지내기에는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2013년에 자녀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로 터를 옮겼다.
  필자는 소식을 듣고 사진이라도 담을 양으로 봄날에 선생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 안에는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붉은 자태를 터뜨리고 바람은 저만치 처마의 풍경(風磬)을 흔들고 있었다. 
  90년대 말에 ‘부안시민문화모임’에서 선생을 모시고 지역 답사를 하면서 선생과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9년에 전교조 운동을 하면서 부안여고에 들러 조합원 교사들의 피해를 막아보려고 얼굴을 붉히며 만나기도 했다. 이 일 후에 10년이 지나서야 선생을 지역현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의문 나는 사실들이 있으면 선생께 묻고 꾸준히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마다 정확한 기억력과 깊은 학문의 답을 들으며 머리를 숙였다.
  소재선생은 1971년에 부안읍 동중리의 초가집 5칸 집을 샀다. 이 낡은 집을 헐고 1993년에 한옥 4칸 겹집을 짓고 서울의 인사동에서 풍경을 구해다가 추녀 네 귀에 달았다. 옛말에 “네 귀에 풍경 달고 사느만”이라는 말은 평안한 집에서 잘 사는 것을 말함이니, 바람이 불면 은은한 풍경 소리는 사찰의 선방에 있는 것처럼 몸으로 들어왔다.
  부안은 선생이 평생 학문대상으로 삼은 곳이다. 이 집 소재서실(素齋書室)에서 글을 읽고 쓰며 지내셨다. 지역에는 역사 사료들이 재련되지 않은 원석처럼 묻혀 있고 돌보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선생은 뛰어난 기억력과 사물 하나하나를 허투루 보지 않는 과학자와 같은 관찰력으로 사료를 모아 분석하며 글을 썼다. 처음에는 구전민요를 접하면서 민속학으로 출발하여 『향토문화와 민속』이라는 책을 펴냈고, 《김형주의 부안이야기》로 부안의 역사를 사료에 근거해서 정리했다. 부안의 역사는 선생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지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발품을 팔아 모았던 자료를 정리하여 《속신어 이야기》와 《민초들의 옛 노래》를 냈다. 선생의 이런 작업이 아니었더라면 선조들의 삶이 한순간에 몽땅 사라질 뻔했다.
  『김형주의 못다한 부안이야기』라는 자서전을 내면서 선생은 지역의 거리에 섰다. 지금까지의 연구가 사료를 검증하고 모았던 자료를 정리하고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라면, 지역사의 증언은 자신에게 냉혹할 뿐 아니라 가까운 지인에게도 날카로운 평가의 칼을 대야하는 아픈 일이었다. 이 길은 증언 속에서 시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험한 소리도 들어야 하는 거친 일이었다. 거센 바람과 폭풍우 속의 부안의 길은 결코 녹녹치 않았고 햇빛을 가릴만한 나무도 변변치 않은 힘든 길이었다. 자서전을 낸 후에는 책 내용으로 인해 험한 일을 겪기도 했다.
  선생이 했던 지역사 연구는 8월의 뙤약볕 아래 호락질로 땀 흘리는 농부의 농사짓기다. 이것은 원료의 마련과 제품 생산까지를 혼자서 책임지는 가내 수공업으로 수고와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는 거친 작업이었다.
  선생의 연세는 올해 88세로 미수(米壽)다. 이제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청년처럼 글도 쓰시고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현역 역사가라고 생각한다. 선생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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