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심 엇이 권력욕 없이 민족독립과 인간평튿의 해방세상을 추구한 '조선의 호치민'과 같은 혁명가 김철수 선생

차제에 필자와 지운 김철수 선생의 짧은 상봉과 인연을 부안민중사의 지면에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일찍이 조숙했던 고교생의 시절에 사상계를 탐독하면서 한양대 한태수 교수의 한국정당사를 통해서 몽양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과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의 강령들과 당활동들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아나키스트 혁명가 정화암 선생과 진보당의 이론가 이동화 선생 등을 만나면서 한국과 중국 및 세계의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에 매우 깊은 관심과 나름대로의 공부를 추구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고려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역사적으로 편찬했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탐독하면서 우리 고향인 전북과 부안이 배출한 이 땅의 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 활동에 있어서 지운 김철수라는 매우 걸출한 인물이 있었음을 발견하였고, 더구나 김철수 선생이 매우 고령으로 부안 향리에서 은거하면서, 김준엽 김창순 공저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집필작업을 위하여 내장산 호텔 등에서 매우 귀중한 생생한 운동적인 대담을 들려주고 자료로 제공하였다는 것을  이미 70년대 초반에 알 수 있었다.

기개 높고 고절한 선비 혁명가 지운 김철수의 노년의 풍모

그리하여 언젠가는 김철수 선생을 한번 꼭 뵙고 역사적인 인물의 소중하고 생생한 말씀을 듣고 싶고 어떤 것들은 질문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슴에 지니고 젊은 시절의 많은 시간을 숨가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막상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부끄럽지만 자신의 젊은 날은 나름대로의 민주화의 조국을 꿈꾸며 학생운동 청년운동을 이어갔고, 그러면서도 누구 못지않게 나름대로 당시와 우리 조국의 상황에서는 철저히 금압되어 있던 사회주의 이념을 공부하고 공동체적인 사회와 조국과 세계의 상으로 추구하였다. 그러기에 운동권 인물에서 매우 진보적인 사제가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었으며, 사제가 되어서도 노동사목을 희망하면서 공장에서 잠시나마 노동체험을 하면서 민중과 하나가 되는 삶의 실천을 위한 작은 노력도 기울였었다. 그러나 당시에 교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딛쳐 다시 일반사목을 하다가 더 깊은 공부를 위하여 독일유학을 떠나가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 나는 유학준비에 분망한 상황에서도 지운 김철수 선생을 꼭 한번 뵙지 못하면, 워낙 높은 연세의 지운선생이셨기 때문에 유학을 다녀오면 지운선생께서 지상의 어른이 아닐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어서 어느 날, 작심하고서 무조건 부안의 이안실로 지운선생을 찾아 뵈었던 것이다.

당시에 전화도 없었고 계실지 출타하셨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무조건 나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와서 주소 하나만을 의지해서 이안실을 찾아갔다. 당시만 해도 마을 도처에 간첩을 색출하자는 붉은 글씨들이 여기 저기 도처에 흉하고 크게 발견될 수 있던 상황과 시절이어서 다소 신경은 쓰였지만 나의 지운선생을 뵙고자 하는 열정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선산 옆에 스스로 지으셨다는 작은 흙집에서 내가 계시냐고 큰 소리로 선생님을 찾았을 때에, 정말 허리가 굽은 작은 노인께서 얼굴을 보이시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 정중하게 절을 드리고 선생님을 존경해서 신학박사과정을 위하여 독일유학의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뵙고자 찾아온 최자웅 신부라는 것을 밝히자 선생님께서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내가 여러 가지로 오랜 독서를 통해서 평소에 궁굼해 하던 운동사의 근본질문들을 드리자 선생께서는 매우 생생하게 많은 소중한 역사의 진실들을 말씀하여 주셨다. 매우 온화하고 평화로운 지운선생의 인상이셨고, 또한 연배에 비해서 정말 너무도 총명하고 젊은 만년 청춘의 에너지와 지성도 놀랍게 보이셨다. 이안실 툇마루에는 초대 조공비서 김재봉의 아드님이 선생께 선물한 판각이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가 초봉동지 김철수에게 보낸 친필 연하장과 휘호

실제로 내가 감명을 받은 몇 풍경도 지금도 약 40년 전의 많은 생생하게 나의 기억 속에 떠오른다. 우선은 너무도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지운선생의 이안실 풍경에 나는 놀랐다. 흙벽 그대로인 작은 방에 쥐들도 오가고 있었지만 선생께서는 너무도 웃으며 태연하셨다. 그리고 작은 방 구석에 선생의 앉은뱅이 책상이 있고 일어로된 맑스주의 철학책들이 있었고 또 내게 너무도 인상적인 것은 책상 위 벽에 작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의 내용은 독일 베를린의 나치 시절의 국회의사당 풍경이었는바, 러시아 붉은 군대가 옛 나치스 독일의 깃발을 내리고 붉은 적기를 계양하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작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지운 선생께서 당시에도 갑호 사찰 일호로 아직 엄연한 감시의 대상일지라도 자신이 분명한 사회주의 혁명가임을 얼마나 당당하게 선언하는 삶을 살고 계신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방과 사진임을 깊은 감동과 인상으로 간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시간에 걸쳐 나누었던 선생과의 대화에서 나는 지운선생이 은거하는 노쇄한 흘러간 혁명가가 아닌, 살아있는 민족적 사회주의 혁명가임과 함께 그의 인품과 사상이 어쩌면 한낱 헤게모니의 장악이나 추호의 권력의 사심 없이 민족독립과 혁명과 통일의 의지와 열망으로 헌신의 삶을 살은 ‘조선의 호지명’과도 같은 분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운 선생은 나와 결코 짧지 않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고 귀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내가 작별의 인사를 드리자, 나와의 상면과 대화가 만족하셨는지 본인께서 다시 서울의 나의 집에 답방을 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셨다. 나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황공하고 반가우시고 감사한 제안이셔서 기쁘게 선생님을 모시겠다고 말씀드리고, 날짜를 잡아서 선생께서는 손자 소중씨를 대동하시고 나의 서울 강남의 우거를 노구에 찾아오셔서 그날은 점심을 드시면서 정말 매우 길고 긴 인터뷰와 대화를 나누는 너무도 소중한 시간을 가지셨다. 그리고 먼저 떠난 손자 대신 내가 저물 무렵에 선생님을 모시고 시내로 나가서 인사동의 서실등을 찾아가서 그 곳에서 손자에게 선생님을 인계해드리고 나는 선생님을 작별하였다. 그리고 역시 내가 독일유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에 지운선생은 1986년에 93세로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김철수 선생의 삶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찾아뵙던 80년대 초반과 세상을 떠나실 때는 아직 우리 사회에 지극히 제한된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만 아는 외로운 존재이셨다. 그러나 연구자들 간에 선생의 존재와 삶이 그 후 점차로 알려지고 특히 광복 60년이 되던 2005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민족독립의 헌신과 위업을 이룬 애국투사로 대한민국독립애국장이라는 큰 서훈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을 공인한 이후로는 이제는 그의 삶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세계적 농학자 우장춘박사(흰 한복)에게 민족의식을 부어준 지운 김철수 선생

김철수는 1893년에 전북 부안군 보안면 원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철수는 쌀 위탁업을 하던 부친을 둔 소지주 집안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말에 군수를 지낸 서택환에게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보통학교와 금호학교에서 수학하고 이어서 인촌 김성수가 부친을 설득하여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그의 나이 18세에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치욕을 경험하면서 강렬한 민족독립과 해방의 의지를 불태우던 김철수는 1914년 동경의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하게 된다. 그는 동지들과 귀곡단(鬼哭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박은식이 자신의 호를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뜻으로 만든 것처럼 조국의 노예처지의 슬픔을 안고 민족독립을 위한 강렬한 의지를 담은 이름이었다. 김철수는 그의 동경유학시절에 훗날 민족운동에서 활동하는 신익희, 장덕수, 이광수, 송계백, 백남훈, 현상윤 등의 동지들을 만나면서 항상 그의 놀라운 의기와 행태로 인하여 늘 빼어난 첫 봉우리-초봉(初峰)이라는 아호를 얻는다. 상해시절에도 독립운동의 동지이던 해공 신익희는 훗날 1950년대에 서울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활동하면서 좌우의 이념을 뛰어 넘어서 고향향리의 초야에 묻혀있는 왕년의 젊은날 동경유학의 소중한 벗 김철수 즉, 그리운 아호 “초봉”동지에게 신년 휘호의 연하장을 보내 안부를 묻기도 했다.

동경유학시절 독립열망의 귀곡단 동지들과 김철수

김철수는 1915년, 동경 유학시절에 비밀결사 조직인 열지동맹에 이어서 조선과 중국과 대만의 40명의 동지들을 엮어 신아동맹단이라는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 결사를 만들었다. 이 신한동맹단의 동지들은 각자 조국에 돌아가 자신의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귀한 역할들을 수행하는데 특히 중국의 동지들이 중국혁명에 헌신하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철수와 매우 긴밀한 협력과 활동을 하게 된다. 1919년의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김철수는 1920년에 귀국하여 최린의 집에서 훗날 조선공산당 활동의 중요한 동지가 되는 이봉수, 주종건과 최팔용, 장덕수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이것은 사실상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운동의 결사였다. 이 사회혁명당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이던 성재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조직적 결합을 하여 1921년에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면서 1923년까지 국내외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20년 상해로 건너가서 독립과 혁명활동을 하던 김철수는 이동휘와 더불어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되던 과정에서도 그 빼어난 지도적 인물들이던 진독수, 황각 및 모택동, 구추백, 이립삼 등과 만나 자극을 주고 받으며 서로 교유하였다. 특히 태어난 해가 같은 갑장인 모택동의 경우는 김철수가 그를 각별히 생각하여 모택동이 1976년에 사망하였을 때에, 젊은 날의 그와의 교우관계를 회상하며 “풍우당년...”의 뜻을 같이 했던 추억의 한시를 지어 애도하기도 한다. 그는 1920년 고려공산당 28구락부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 간부로 10월에 고려공산당 베레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된다.

조공책임비서 김철수 재판 조서 기록

상해시절에 김철수는 목숨을 걸고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국경수비대의 추적을 피하여 무려 900리의 광막한 대지와 거리를 풍찬노숙하면서 이른바 상해파의 대표로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파와의 한인사회주의 운동의 뿌리 깊은 대립을 해소하기 위하여 치타회의에서 단결과 연합을 시도하고 이어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을 넘어 새로운 개조를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만들려 하였으나 결렬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상해시절에 김철수는 민족독립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성재 이동휘와 더불어 고려공산당의 재정을 감당하는 뛰어난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런 배경을 안고 김철수는 국내외를 오고 가며 활동하다가 1924년에 귀국, 전북민중운동자동맹에서 활동,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 동경시절의 동지이던 이봉수와 더불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철수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차 조공이 신의주사태로 일망타진 검거 붕괴되자 제2차 조선공산당의 조직부장의 중책을 감당하다가 드디어 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조선공산당의 재건작업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1945년 해방직후 14년의 긴 수형의 공주감옥 52세의 석방기념 사진

김철수, 그의 어깨 위에 한국사회주의와 조선공산당의 운명이 드리워졌다. 그 길은 다시 경성과 해외의 먼 모스코바와 만주를 오가는 망명과 유랑의 풍찬노숙과 잠입, 체포 후 무려 14년의 길고 긴 수형생활이었다. 그러나 김철수는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신념과 통합의 리더쉽과 전략으로 그 모진 십자가와 형극의 길을 외롭고 장하게 걸어갔다. 늘 푸른 초봉-혁명가의 표상인 영원한 첫 봉우리로...!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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