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름다운 청동기시대 유물관

가을에 부안에서 변산으로 내달리는 길은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동심이 가득한 길이다.

어린아이의 고사리같은 손가락처럼 살랑살랑 움직이는 코스모스의 잎과 그 위로 해맑게 웃음짓는 아이의 얼굴을 닮은 꽃잎.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여 춤춘다는 뜻에서 코스모스의 순우리말 이름은 살사리꽃이란다. 누구나 어렸을 적 한번쯤 코스모스를 소재로 동시 한 편 지어봤을 테지만, 그래서인지 바람에 살랑거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가 있는 듯하다.

부안에서 격포 가는 30번 국도를 따라 두어 곡 노래가 끝날 즈음이면 하서면 소재지인 언독리이다. 이곳에서 736번 지방도를 따라 좌회전하면 내변산으로 뚫린 길이 나온다. 그 길로 꺾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암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암리 고인돌 ⓒ 염기동 기자

# 구암마을의 유래

하서(下西)라는 지명은 상서와 함께 부안에서 유일하게 지명의 변천이 한번도 없이 유지된 생명력이 긴 땅이름이다. 조선시대 하서방을 중심으로 1914년에 하서면으로 되고, 부안치소의 서쪽 큰길의 아래가 되므로 하서라 했다. 하서는 선사시대부터 살기좋은 고장이어서 생거부안이라 하여 어염시초가 넉넉했던 고장이었다. 구암리의 고인돌군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거북 모양의 고인돌이 곳곳에 널려 있는 ‘구암(龜巖)’ 마을의 이름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구암(九巖)’으로 바뀌었다가 최근에 바로잡았다고 한다. 구암마을의 땅이름이 왜곡된 연유를 김형주 선생이 들려주었다.

“거북 구자 쓸라니까 사납지요. 왜놈들이 글자가 어려우니까 쉬운 글자로 바꿔놓은 거에요. 일제시대때 그렇게 바뀐 지명이 많아요. 글자만 바꾼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문화를 파괴한 거에요.”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1편에 ‘부안의 땅이름’을 정리하면서 김형주 선생은 “땅이름은 그 곳의 역사와 문화가 화석(化石)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 구암리 고인돌로 엿본 청동기시대

부안에는 여러 곳에 고인돌군이 있다. 하서면 구암리, 백련리 등의 해안 인접지역과 상서면의 용서리·지석리·감교리, 보안면 우동리·남포리·신복리·유천리, 진서면 진서리·백포리 등의 곰소만 인접지역, 내륙지역인 행안면 지석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강과 바다를 끼고 발달한 지역으로 청동기문화가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전파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북 지방에 산재한 고인돌 가운데는 커다란 덩어리돌이나 판석을 그대로 놓거나 작은 돌들로 받침하고 그 밑에 돌널이나 돌무지를 둔 이른바 남방식 고인돌이 많다. 구암리 고인돌군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고 가장 규모가 큰 것들로 사적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민가의 울타리 안에 12기가 있었으나 그 중 10기만이 확인되고 있다.

고인돌 받침돌 ⓒ 염기동 기자

가장 큰 것은 뚜껑돌의 길이가 6.6m, 너비 4.5m, 두께가 80cm인데 여덟 개의 작은 돌들이 받치고 있다.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고 가운데로 갈수록 두터워서 마치 거북바위처럼 보인다.

“고인돌 무덤을 만들자면 땅을 파고, 송장을 묻고 그 위에다 고인돌을 놓고 옥개석을 올려요. 그런데 이렇게 큰 돌을 옥개석으로 끌어 올리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몇날 며칠 걸렸을 것이라는 말이죠. 청동기시대에는 아마도 이 일대에 막강한 세력을 가진 부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 그 누군가의 희망 ‘고인돌 찻집’

90년대 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로 문화유적 답사의 붐을 일으켰다. 그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편에서 구암리 고인돌군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구암리 고인돌집은 그 분위기가 생긴 그대로 청동기 시대 유물관이라 할 만하다. 키 큰 은행나무 몇 그루와 한쪽 담장으로 늘어선 호랑가시나무들, 마당에 즐비한 국화와 한쪽에 비켜선 매화, 만약에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한 허름한 슬래브집 두 채를 헐어내고 기와흙담을 고인돌의 유적경계로 삼는다면 구암리 고인돌집은 답사의 쉼터로서 더할 나위 없는 명소가 될 것만 같다.”

호랑가시나무 열매. ⓒ 염기동 기자
예나 지금이나 구암리 고인돌 유적지가 들어선 이곳은 참으로 아름답다. 고인돌 주변으로 둘러쳐진 담장 안쪽 은행나무 가지에는 누렇게 익은 은행이 조랑조랑 달려있고, 날이 조금더 쌀쌀해지면 고인돌 주변으로 은행잎이 흩날려 더욱 운치를 더할 것이다. 또한 초입에는 호랑가시나무가 푸른 열매를 자랑하며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원래 있었다는 슬래브집은 온데 간데 없다. 원래 이곳에는 가정집이 있었으나 1996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집을 헐어냈다. 당시 사진을 보면 고인돌 옆으로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고 고인돌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며 아이들이 뛰어놀 법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쓸쓸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구암리 고인돌집에 대해 극찬했던 유홍준은 “이곳을 사서 먼 훗날 ‘고인돌 찻집’을 내어 변산에 이르는 초입의 명소로 만들고 싶다”고 적고 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그때의 그 꿈을 간직하고 있을까.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객들의 발길이 잦아질 것이다. 찻집은 아니라하더라도 조그만 쉼터가 마련되어 찻잔의 여울 속에 청동기시대를 오가며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고 바래본다.

# 고인돌공원 또 있었나?

지난 봄 구암리 고인돌군의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는 제보를 받고 취재차 들른 적이 있었다. 주차장 한 켠에 조그만한 안내소가 생긴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 보인다. 화장실 역시 떨어져 나간 문짝은 수리가 되었으나 여전히 지저분한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특히 구암리 고인돌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고인돌공원’이라는 표지판은 눈엣가시다. 선사시대 유적지 고인돌군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 만들어진 공원을 가리키고 있다. 지난해 부안군이 정주권사업을 하면서 체련(體鍊)공원을 조성해서 이곳을 ‘고인돌공원’이라고 이름지었다. 체련공원 안에는 운동시설과 분수대 외에도 고인돌 형태의 구조물들이 있어 언뜻 보면 ‘구암리 고인돌군’으로 착각하기 쉽다.

실제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입구의 체련공원의 고인돌 모조품만 보고 원래 유적지의 고인돌은 둘러보지 못한 채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물론 물리적으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하더라도 원유적지 입구에 유사품을 갖다놓고 복제공간을 만드는 것은 원형의 가치를 파괴하는 일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