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박중빈이 부안 봉래정사에서 원불교의 근본 교리를 완성한 제법 성지

일제를 포함한 무릇 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와 경영의 고전적이며 전형적인 행태가 소위 ‘분리통치정책(Devided & Rule)’이며 ‘채찍과 당근전략(Carrot & Stick Scheme)’이다.

부안 수행시절의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3.1운동의 거족적인 항일운동에 놀란 일제는 과거의 무자비한 지배정책과 방식을 바꾸어 무단통치 대신에 이른바 문화통치를 들고 나왔다. 이 문화통치는 더 이상 철권과 강압 통치만으로는 조선을 통치할 수 없다는 변화이자 우리 민족과 민중이 3.1운동의 항쟁으로 얻은 중요한 성과이기는 했다. 그러나 허울 좋은 문화통치는 일제가 세계와 조선 민중에게 그들이 변했다고 선언하는 가시적 정책이기는 했으나 실제 조선통치의 제1방침에 있어서는 ‘조선의 독립은 허용치 않는다’라는 절대적인 명제와 원칙 속에서 대단히 사기적이며 기만적인 통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는 1919년 9월 신임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마사코가 천명한 ‘조선인은 일본인과 똑같이 일본 천황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사탕발림으로 소위 ‘조선문화의 창달과 민력 증진, 헌병경찰제의 보통경찰제로의 전환, 조선인의 총독부관리 등용, 조선인의 얼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일부 허용, 조선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 허용’ 등의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제가 헌병제를 대신한 보통경찰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3.1운동 후에 전국의 감옥이 더 늘어났고 경찰관서와 경찰의 숫자가 거의 4-5배로 늘어났고, 그 규모도 1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일제는 점증되는 사상범들에 대한 대책으로 악랄한 치안유지법(1925)을 실시하여 엄격한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특고형사와 사복형사, 밀정 등을 대대적으로 편성하여 조선사상운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1930년의 일제 경찰의 숫자는 무려 18,811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사기와 기만통치에 애국독립투사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상징적인 거사가 평남 덕천 출신의 강우규(1855-1920) 의사에 의한 1919년 9월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 암살사건이었다. 특히 강우규 의사는 폭탄투척 의거 당시에 66세의 고령이었다.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폭탄투척에도 불구하고 처단은 실패하였으나 그러나 평생을 참된 기독교인과 투철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고귀한 삶이었고 당시 2000명에 달하던 ‘조선노인동맹단’을 대표한 의거였다.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서 장엄하게 순국하였다.

강우규 의사 체포 기사

또한 일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과 천도교의 <개벽> 등의 잡지가 창간되고 많은 사회단체등도 결성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신문의 기사나 출판물의 경우 엄격한 사전검열을 통해 식민정책에 비판적이거나 민중적 자각을 불러올 수 있는 내용들은 무자비하게 삭제, 압수, 벌금, 정간, 폐간하거나 출판금지를 단행했다. 집회의 경우에도 경찰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 이들의 직접 감시하에 진행할 수 있었다. 아울러 3.1운동으로 조선민중의 독립의지와 단결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조선인의 독립의식을 말살하고 민족분열을 획책하는 것을 저들의 당면한 과제로 삼아 ‘조선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인물을 많이 얻는데’ 달려 있다고 하면서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적극적인 친일파의 양성에 나섰다. 특히 일제 총독부는 3.1운동 후에 조선인들 가운데서 일부 대지주, 자본가와 지식인들이 크게 흔들리자 이들을 상대로 하여 식민지배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실력을 기르면 독립을 시켜준다는 식으로 회유하면서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친일파 육성에 나섰다.

한편 3.1운동이 거족적인 규모의 봉기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자 일부 민족 부르주아지 상층과 지식인 등 일부조선인들은 조선의 ‘즉시 독립’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치열한 항일투쟁 대신에 일제와의 타협과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른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방안으로 교육진흥과 산업육성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해방후 한민당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호남의 대지주이며 경성방직의 자본가인 김성수 일가의 <동아일보> 계열과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앞장서며 합류하였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진행되었으나 이 운동은 곧바로 민족주의자와 초기 사회주의자 세력간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 있으켰다. 결과적으로 구호는 좋았으나 국산품 애용차원의 물산장려운동은 당시에 이를 뒷받침할 조선내의 민족산업과 생산력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물가만 올라 일부 상인이나 자본가만 이익을 얻는 결과로 나타났다. 민립대학운동도 당시 조선의 현실은 고등교육보다도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다수 민중들의 대중교육이 더욱 긴요하고 시급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과 좌절의 결과 속에서 이들 민족부르주와지 세력은 새롭게 자치운동으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상해의 임정의 독립신문의 주필로 있던 이광수가 총독부의 간첩으로도 불리운 허영숙의 파견과 회유공작에 포섭된 후에 1921년에 귀국하여 총독부 주선으로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 된다. 그리고 그는 이른바 ‘실력양성’과 소위 열악한 조선민족의 ‘민족성 개조’등을 주장하면서 1924년에 5회에 걸쳐 연재의 글을 실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일제가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하고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길러 자치를 이루자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하고 적극적인 친일운동에 합류한다. 이와 비슷한 행태로 3.1독립선언을 기초한 최남선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고 편수회원이 되어 친일적인 조선사편찬에 합류하였다. 33인의 일인이며 천도교의 새로운 지도자였던 최린 또한 일제의 문화정책에 순응하면서 결국 필연적인 친일파의 길을 걸어갔다.

조선어 연구를 위한 현충사 모임

그러나, 한편 국어연구에서 개척자 주시경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조선어연구회가 1921년에 발족하고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개칭된 현 한글학회는 우리의 언어와 국어의 체계적 발전과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김윤경등과 상해에서도 김두봉 등이 노력한 이들 한글학자들은 우리의 ‘한글날’을 제정하고 사전의 편찬에 착수하는 등 일제에 맞서서 국어보급과 민족문화의 근본인 우리 말을 발전시키고 지키는데 공이 컸었지만 결국은 훗날 ‘조선어학회사건’이라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체포, 수감, 순국하는 불행을 겪는다.

항일 역사학자이자 임정의 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선생

우리의 국사연구에 있어서도 애국적 계몽사학의 전통을 이은 민족주의 사학이 1920년대에
백암 박은식(1859-1925)과 단재 신채호(1880-1935)를 중심으로 성하였다. 특히 스스로 나라를 잃은 태백광노(太白狂奴)로 부른 박은식은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렬히 비판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맥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서건국사>,<안중근전>,<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을 저술하였다. 동일하게 신채호 역시 민족의 존엄성과 혼을 지키기 위하여 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하면서 대표적인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이순신전>,<조선혁명선언>등을 저술하였다. 이 민족주의 사학연구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상해임정의 2대 대통령까지 지낸 박은식이나 중국공산당의 원로인 북경대 도서관장이던 이대교와 친교를 쌓은 신채호는 곤고한 망명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연구를 지속하는 고난을 겪다가 단재의 경우에는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또한 민족주의 사학에 맞서는 일제의 조선사편찬 작업에 이완용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한 이병도 또한 소위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개별적인 역사적 사료와 사실의 정확하고 충실한 역사서술을 추구하며 합류하였다.

만해의 수형 기록 사진

3.1운동 후에 한국문학이 큰 발전의 전기를 맞았는데, 초기의 이광수에 의하여 절정에 달한 계몽과 설교를 위한 문학을 벗어나서 본격문학으로 접어들었다. 이리하여 1919년에는 <창조>,1920년에는 <폐허>,1922년에는 <백조>등의 문학동인지가 출현하였고 감상적이며 탐미적인 병약한 문학에 대한 반발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가람 이병기 등의 시조운동과 사회의식과 사상을 고취하는 1923년의 신경향파문학과 나아가 사회주의혁명과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 강렬한 프로문학이 1925년 8월에 출현했다.

수감중의 단재 신채호 사진

한편 부안의 변산에서는 훗날 새로운 민족불교의 기운이 전남 영광에서 태어난 원불교의 교조가된 소태산 박중빈(1891-1943)에 의하여 준비되고 익어갔다. 영광에서 저축조합과 간척사업으로 힘을 양성한 박중빈은 그가 29세 되던 삼일운동이 발발한 1919년에 민중들의 고통이 한이 없음을 보면서 구인제자들과 3월26일부터 특별기도와 산상기도를 시작했다.
이런 기도로 전무출신의 기본정신을 만들은 박중빈은 일제의 감사와 통제가 노골화되자 박중빈은 몇몇 제자들을 대동하고, 그해 가을 부안의 변산–봉래산으로 옮겨 12월에 실상사 옆에 몇 간의 초당을 마련하여 수행과 기도처로 삼았다. 1920년에는 원불교의 기본교리인 인생이 마땅히 행하여여야 할 ‘사은사요(四恩四要)’의 교리강령을 발표하고 <조선불교혁신론>과 <수양연구요론>등을 초안하고 월명암의 백학명 스님을 비롯한 고승들과 교유하였다. 1921년에는 실상초당 뒤편에 석두암 곧 봉래정사를 마련하고 신자들을 훈련시키며 교단공개를 준비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가 생활 속에서 진리와 힘을 실천하고 만드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이념과 물질개벽시대에 정신개벽을 이룰 새로운 일원상의 원불교 종교의 문을 열 준비와 함께 인류를 구원할 교법을 제정하고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지향하였다. 박중빈의 이와 같은 부안 변산에서의 수행과 행적으로 인해서 원불교에서는 이곳 부안의 변산을 훗날 민족의 4대종교로 성장하는 매우 중요한 교단발전의 초석이 되는 수행의 에너지와 원력을 만든 제법성지(制法聖地)로 일컫는다.

글 /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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