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의 용화할머니 집을 찾으면 어느 때 부터인지 방 벽에 신문에서 오려 붙인 사진 하나가 있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2000년 6월 13일의 사진이다. 할머니는 통일을 열망했다.

할머니의 생일은 두 개다. 본래는 1919년 11월 10일(음)인데 아버지는 독립의 의지를 담아 딸의 출생을 3월 1일로 호적에 올렸다. 아버지 김철수 선생은 일본에 맞서 싸우다가 해방 후에 감옥에서 나온 항일인사지만, 사회주의에 기댄 독립운동이라는 이유로 평생 1급 감시 대상으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독립운동한 집안은 3대가 망한다더니 김철수 선생의 손자들도 제대로 직장생활하기가 어려운 연좌제에 묶여 있었다. 영일은 건국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여 앞길이 창창했지만 취직조차 되지 않았다. 지도교수가 가정 사정을 알고 나서는 “자네는 취직할 생각 말고 있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은 조상의 독립운동이 죄가 되는 나라에서 산 것이다. 이런 속에서 생계는 꾸려야하기에 김용화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팔고 다니는 잉꼬리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40대엔 약종상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따서 계화면 돈지에 삼성약방을 운영하며 가족을 거두었다. 자신은 슬하에 혈육 한 점 없었지만 언니 금남이 남긴 조카 다섯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아버지를 모셨다.

김철수 선생은 남한에서는 감시를 받는 처지이고 북한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독립운동가다. 그의 1주기에 세운 비석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비’다. 이렇게 평가를 미룬 것은 남과 북이 통일이 돼야 비로소 그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2005년 광복 60주년에 김철수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의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은 우파 독립운동가의 활동만 배워온 우리들에게 비로소 반대쪽의 독립운동사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용화 할머니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역사의 진보를 위해 자양분이 된 혁명가로 이해한다. 독재정치가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자 할머니는 이제는 살만한 세상이 됐다며 삶의 의지가 강해졌다. “내가 이 동네 사람 누구도 못한 것을 할 것”이라며 100살을 넘겨 살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용화할머니를 모시던 조카 구일씨로부터 “말을 하려니 눈물이 나려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2월 2일 오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다. 조문하러 인천으로 가는 차 속에서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다. 소녀 시절에 노래 부르기와 시를 좋아했다는 할머니, 독립운동 한 아버지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는 감시 속에서 험한 세상을 보낸 할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한국전쟁 때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남편 이복기 선생이랑 거의 70년 만에 만나시겠어요. 두 분이 반갑게 손잡은 모습 그려봅니다.

할머니는 이웃 사람들에게 따뜻한 용기와 추억을 많이 남겼어요. 그동안 찍은 할머니 사진과 음성녹음을 들으며 기억 할게요.

많이 그리울 거예요, 용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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