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의 발단이 된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부안 출신의 걸출한 독립투사 김철수도 포함되어 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이는 위당 정인보 작사의 삼일절 노래이다. 삼일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후, 한세대가 흘러간 25년 만의 가장 커다란 우리 민족의 함성과 민중의 독립을 향한 꿈틀거림과 절규였다. 당시 2천만 인구 중 200만명의 동포들이 일어나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싸우며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투옥되었다.

전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는 무려 합방 후 10년을 저들의 무자비한 무단정치와 헌병경찰제도로 조선민중을 억압하고 노예화시켰으며, 그 위에 1910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공립보통학교에서는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한글교육을 제한하고 수신(修身)과 일본어를 강제로 가르치게 하며, 심지어 학교의 훈도로 부른 교사들도 군국주의적으로 칼을 차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해외, 특히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그곳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우며 신문을 만드는 등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이루크츠크, 북간도, 만주일대 등이 항일운동의 중심지들로 되면서, 이들 지역에서는 비교적 조직적인 무장항쟁이 전개되었다.

고향과 조국을 등지고 만주와 노령으로 떠나가는 동포와 그를 조사 취체하는 일제 관헌.

때마침 일본에서는 쌀소동과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특수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일반 노동자나 도시빈민은 높은 물가로 인해 생활의 궁핍을 겪고 있었다. 이시기에,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였고, 일본에는 민주주의사상이 팽배하여, 이 시기를 대정 디모크라시의 시대로 일컫기도 한다. 쌀폭동은 일본전역에의 급속한 파급 속에서 데라우치 내각이 붕괴되고, 일본은 노동운동, 농민, 학생운동을 비롯한 활발한 사회운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재일조선인독립운동을 자극하였으며, 또한 국내에서 일제에 맞서서 일어나던 각종 사회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일제의 10년간의 조선의 무단통치는 민족적 요구를 일체 탄압, 금지, 억압하였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하였지만, 이것은 오히려 일제에 대한 항쟁심을 더욱 증대시켰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완료와 함께 임계점에 달한 우리 민중들의 저항의식이 드디어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활화산으로 펼쳐진 것이다.

삼일운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

맨 먼저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일본의 동경유학생들이었다. 1919년 2월 8일 최팔용의 지도로 조선중앙YMCA회관에서 약 200명이 참가한 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운동의 산파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다. 부안이 낳은 걸출한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도 이 당시에 와세다대 정치과에 유학중인 유학생 지도자의 하나였다. 이후 동경에 있던 약 600여명의 유학생 가운데 절반이 귀국하여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월 22일 일제에 강제퇴위 당했던 고종이 일본인 의사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민중들의 고종에 대한 애도는 곧바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불붙어 고종의 장례식인 3월 3일을 앞두고 3·1운동으로 폭발된 것도 배경의 하나였다. 그러나 보다 구조적으로는 3·1운동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10년간의 무단정치와 헌병경찰제도의 조선민중에의 억압과 독립투쟁의 탄압에 대한 거국적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당시의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사회구조가 낳은 모순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즉,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조선에 대한 모진 억압과 불평등의 통치체제는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착취민족과 피압박민족간의 피할 수 없는 대립적 이해관계와 모순적 갈등관계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밖으로는 중국에서의 봉건적 청조를 종식시킨 손문의 공화주의 신해혁명, 소련에서의 레닌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에 이은 자극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른 커다란 국제정세의 변화와 식민지문제 해결에 대한 이른바 윌슨의 소위 민족자결론이 한민족에게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제반 요인이 기반이 되어 드디어 3·1운동이 일어났다.

3·1만세운동의 직접적인 주도세력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 및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계 지도자였으며, 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학생들이 주요세력으로 동원되었다. 원래 이 선언문의 서명자인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의 산파역할을 수행한 기여도는 큰 것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이들이 민중 앞에 민족의 지도자들로 당당히 서지 못하고 한낱 요정에서 선언서만 읽고 일제에게 스스로 투항한 것에서 보인 것처럼 그들은 지도력의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의 민족자결을 허용하지 않고 탄압한 미국과 윌슨의 민족자결선언에의 지나친 신뢰와 근거없는 낙관적 기대 속에서 오직 비폭력, 평화로운 만세운동에 의해 조선의 독립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커다란 오산이었던 것이다. 

6.10만세 운동 때 서울 태령로 거리를 메운 사람들.

운동의 초기과정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배포하고 시위를 주동한 천도교도, 기독교도 및 학생세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상징의 하나가 만세운동 중에 고문당하고 옥사한 18세의 이화여전 학생 유관순 열사였다. 또한 제암리 교회의 일제의 무자비한 기관총난사와 무참한 학살극 등이 있었다. 검거된 이들의 종교별 구성을 살펴보면, 물론 무종교자가 가장 많지만 천도교와 기독교의 비중이 커서, 종교가 3·1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 강조되던 비폭력적 방법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시위군중을 끌어모으고 기반이 확대됨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그 주요 원인은 일본 관헌의 무절제한 탄압과 잔인한 폭력행위로 인하여, 더 이상의 비폭력평화시위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3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만세운동 참여자는 무려 200만에 달하고, 발생건수 3,200여 건, 검거자 수는 1만 525인에 이르렀고, 판명된 사망자 수는 7,907명이나 실제로는 1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부상자 수는 1만 5961명이나 되었다. 참으로 가공할 참담한 피해였다.

3·1운동은 사실상 운동을 이끄는 지도부의 부재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처절하게 실패하였지만, 이로써 민족운동의 질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이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한 것인 반면에 3·1운동은 새롭게 민족독립과 반봉건 공화주의를 목표로 한 민중적 운동이었다. 이처럼 운동의 형태 및 그 목표에 있어서 질적 전환을 가져와, 3·1운동 이후 민족독립운동은 본격적인 민중들의 소작쟁의, 노동쟁의, 학생운동, 사회주의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결과적으로 3·1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당연히 정부수립이 계획되었고 상해 임시정부가 법통을 이어받게 되었으나 한편, 1917년 러시아혁명의 큰 영향 속에 1920년 상해 고려공산당이 조직됨으로써 민족독립운동은 이후 소위 우파진영과 좌파 공산주의운동의 분열로 이어져 추진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 성명서.

막상 부안에서의 3.1운동은 일 년 이하의 징역을 산 사람이 한 사람일 정도로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때문에 부안에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동진면의 은희송이라는 순사보 출신에 의하여 만세운동이 비롯되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매우 늦은 3월 30일 오후 8시에 뒷산 봉화와 함께 부안읍의 만세가 있었고 4월18일에 줄포와 인근부락에서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미미하다고 할 수 있던 부안에서의 3.1운동의 애석함을 보상하듯이 부안의 아들 백정기 의사가 3.1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과 애국의 삶으로 큰 결단을 하고 치열한 무장 항일독립투쟁의 걸출한 삶으로 옥사, 순국에 까지 이르렀음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정기(1896-1934)의사는 부안읍 신운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며 14세 때에는 간재 전우 밑에서 잠시 공부도 하였다. 23세 때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3.1운동을 목격하고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고 급히 귀향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평화적 만세운동의 한계를 실감한 백정기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의식이 전환되어 인천의 일본군 기관을 습격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이회영, 신채호 등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1923년 중국 호남성 동정호 근처에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 후 1924년 일본에 들어가 동경의 조천수력공사장의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한 후 다시 중국 상해로 건너가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정화암 등과 함께 폭탄제조기술 등을 익혔다. 1928년 중국 남경에서 열린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 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고 1931년에는 한국, 중국,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흑색공포단을 만들어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기관들에 대한 파괴, 요인암살, 친일파 숙청 공작을 추진했다. 아울러 상해에서는 각지에서 모여든 무정부주의자들을 이회영, 정화암과 함께 규합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백정기는 여순에서 일본 수송선 1만 5천 톤급을 폭파하였고 중국 내부의 여러 곳에서의 폭탄의거로 일본 관민들에게 준 위협이 적지 않았다. 그는 1933년 이강훈, 이원훈 등의 동지들과 함께 상해 홍구 공원에서 연회 행사 중인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와 일본 대사관원과 친일 중국인사 등을 습격하려다가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에 옥사하였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주석의 주도하에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그간 적지에 있던 백정기 의사의 유골이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에 장엄한 국민장으로 안치되고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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