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만 해도 격포의 수성당은 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곳은 해안가를 지키는 군인들의 작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12월 말이면 위문품을 들고 고생하는 수성당의 군인들을 찾아 나섰다. 학생회 간부들과 윤리부에 속한 교사들이 격포까지는 버스를 이용하고 격포 배차장에서 그곳까지는 걸어갔다. 그 날 1985년 12월 25일에 찾은 수성당 주변은 이곳저곳에 돌들이 쌓여 있어 을씨년스러웠고 군인들의 초소와 막사들은 위장막을 덮은 채 추위 속에 떨고 있었다. 수성당 옆 여우굴을 통해 간첩선이 들어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수성당(水聖堂)은 칠산바다를 지키는 해신(海神) 개양할미를 모시고 제사하는 당집이다. 딸 아홉 중에서 여덟은 각 지에 시집보내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사는데, 키가 구름 위로 솟을 정도로 컸다한다. 개양할미는 굽이 달린 나막신을 신고 서해 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어 어부들을 보호하고 바다의 깊은 곳은 메우고 얕은 곳은 파서 고르게 했다고 한다. 칠산바다의 험한 풍랑이 뱃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위험은 상존했다.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아래와 같이 격포 뱃사공들의 위험을 상소했다.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년삼로(長年三老) 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3년(1747) 10월 2일

장년삼로라면 바다 생활이 몸에 익은 노련한 뱃사공을 말함이니 이들도 칠산 바다의 풍랑은 헤쳐 나가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격포 앞 바다의 해양환경은 연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연안 반류가 흐르고 조류가 심하다. 주변에 섬들이 많아서 조류의 흐름에 장애가 되어 물의 흐름이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큰 파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격포 앞바다는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컷 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돛단배는 연안의 산봉우리, 해안의 모양, 섬 같은 것을 목표물로 하여 뱃길을 잡아 간다. 큰 바다를 횡단할 수 있는 항해술이 개발되지 못했던 6~7세기 이전에는 배들이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 부분을 추적하면서 항해하였기 때문에 해안이 돌출되고 주변에 표지로 삼을 만한 큰 산을 가지고 있던 격포는 항해상의 주요한 기점이 되었을 것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은 1992년의 수성당 주변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의 제사 터를 발견했는데, 삼국시대부터 어업 및 해상 교통과 관련하여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제사 유적은 고고학계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그 유물은 전주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수성당을 생각하면서, 부안지역의 많은 해양 문화재들의 보존과 알리는 일이 시급함을 느낀다. 이런 문화재와 지역에 산재한 농경문화를 담고 소개하는 작은 박물관을 부안에 건립하면 어떨까. 정리되지 않고 소외된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은 미래 부안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준비이며 행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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