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들의 감옥으로 악명을 떨쳤던 서대문 형무소.

일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민족독립과 자존을 위해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은 흔히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불문율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파다하였다. 이렇게 회자되는 말이 처절한 독립운동의 현실이었어도 일제 36년간 일본의 지배기간에 치열한 독립운동이 하루도 멈추지 않은 날은 없었다. 이러한 백절불굴의 강인한 독립에의 의지와 독립운동을 차단하고 금압하기 위해 일제는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조선지배를 위한 끔찍한 감옥제도와 무단헌병제도를 조선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 노예국가 되면서 삼천리 금수강산은 일제가 만든 거대한 감옥이 되고말았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고 강점에 들어가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지배방식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가차없이 잔인하게 탄압하고 그들이 만든 감옥소에 가두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 노예국가로 만들면서 1908년에 전국적으로 16개소였던 감옥 수를 30개 이상으로 늘리고,  그 감옥에 일제는 ‘사상범’으로 불리우는 독립운동가들을 무수히 체포, 수감하였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면서 조선 전체가 일체의 주권도 자유도 없는 일제의 거대한 감옥이 되어버렸고, 일제는 구체적인 작은 감옥인 형무소를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치욕적이고 모멸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형무소의 사형장.

그 대표적인 감옥이 1908년에 만들은 서대문 현저동에 있던 감옥이었다. 일제는 서대문 감옥을 크게 증축해서 처음 지을 때의 규모에 비하여 30배 이상으로 크게 만들었다. 또한  1912년에는 마포의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크게 짓고 경성 감옥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서대문 감옥은 1923년에 형무소로 개명되어 악명을 떨치면서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치하에 체포된 독립운동가들과 투사들로 언제나 가득찼다. 서대문 형무소에 파견된 일제의 고등계 형사들은 독립지사들을 취조한다는 명분으로 청사 지하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악랄한 고문과 구타를 일삼았다.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정식으로 재판을 받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후 감옥으로 옮겨가면서 옥사에 이르도록 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형무소 지하의 각종 끔찍한 고문 기구들.

수감자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인 최소한의 의식주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였고 주식은 콩과 좁쌀이 대부분인 속칭 틀로 찍은 가다밥은 늘 규정보다 적게 배급되어 항상 열악한 영양과 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한 냉난방도 전혀 되지 않는 감방에서 화장시설도 없어 정원을 훨씬 넘긴 수형자들이 오물더미에서 서로 뒤엉켜 지내면서 질병과 추위로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수형자들은 하루 30분간만 주어진 휴식 시간 외에 10-14 시간씩 일-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실제 형살이를 의미하는 징역(懲役)이라는 말은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일제치하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치욕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큰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세력과 집단의 매국노들이 있었지만 이들 보다도 더 비교할 수 없는 민족독립운동을 위한 치열하고 숭고한 투쟁이 끝없는 불길과 강물로 도도히 흘러갔다. 후에 다루게 될 부안이 낳은 걸출한 독립투사겸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지운 김철수 선생은 무려 15년의 세월을 민족을 위해 두차레에 걸쳐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일제가 거대한 조선을 감옥소로 만들면서 구체적인 국내 민중들에 대한 통치의 원칙은 야만적인 무단통치(武斷統治)였다. 일제는 조선의 무단정치를 위하여 그들의 총독을 언제나 전형적인 현역인 육군대장, 해군대장들을 임명하였다. 한번도 일제의 전 통치기간을 통하여 문관출신의 총독이 부임한 예가 없었다. 심지어 3.1운동의 거족적인 항쟁 후에 민심을 추스르는 문화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총독은 언제나 대장출신들이 부임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강압통치의 적용은 헌병경찰제도였고 또한 야만적인 태형제도였다. 이것은 시체말로 우리 조선민중을 채찍과 몽동이로 개나 짐승처럼 때려잡자는 식이었다. 이를 위해 일반치안을 위한 경찰업무 역시 군인인 헌병이 맡도록 했다. 그야말로 조선을 온전히 군대의 힘으로 억압하고 통치하겠다는 야욕과 의지였다. 이들 헌병경찰 제도는 우리 민중들에게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헌병경찰은 법률에 따라 즉결심판권을 지녔기 때문에 신분은 비록 경찰이지만 상당한 범위의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사전 영장과 같은 어떠한 조건 없이도 처벌이 가능했다. 헌병경찰은 언론을 감독 지도하고 사회풍속에 간섭하며 신용을 조사하는 등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에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일일이 감시하고 간섭했다.

만주 동포들의 마을 옛터.

더 크고 야만적인 문제는 이 헌병경찰의 심판과 운용에 참으로 전근대적인 ‘태형(笞刑)’이 있었는데 일본인과 외국인들에게는 이 태형의 징벌이 제외되었다. 이는 일찍이 갑오개혁 때, 이 제도가 비인간적인 제도라는 이유로 폐지되었는데 일제가 이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었다. 즉 이것은 일제의 헌병경찰들에게 조선민중을 몽둥이로 두둘겨 팰 권리를 법적으로 준 것이었다. 한번에 90대까지 때릴 수 있는 이 태형은 부상을 입는 것은 물론 때로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야만적이고 악랄했다. 태형을 가할 수 있는 범죄로는 심지어 자기 집이나 집 앞을 청소 하지 않을 경우나 밤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경우, 기독교 신자인 경우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어린이가 울면 “호랑이가 온다”고 달래던 것이 이제는 “순사가 온다”라는 말로 바꾸어진 끔찍하고 야만적인 시대와 통치를 일제가 무단정치와 헌병경찰제도와 거대한 감옥과 태형을 통해서 일제가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 끔찍한 세월이 3.1 만세로 거대한 항쟁이 이루어져 소위 저들의 문화통치로 변화하기 까지 10년 세월로 흘러갔다.

노령의 블라디보스토크 이주민들의 신한촌 전경.

이러한 공포와 억압적인 제도와 정치를 시행하면서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조선 천지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서 조선의 토지를 강탈하였다. 이들은 1910년 9월에 총독부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에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후에 1918년까지 조선민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토지소유권, 토지의 가격, 지형 및 지목 조사를 광범하게 실시하면서 사실상 조선총독부가 조선 전체의 가장 막강한 소지소유권자가 되었고 총독부의 지세 수입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일제는 이 조사사업과정에서 구 황실 소유지인 궁장토, 역둔토 등은 물론 미개간지, 개간지, 간석지와 산림 등을 마땅한 신고주가 없다는 이유로 국유지 혹은 유력인사의 민유지로 편입시켜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겼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확립된 토지소유권은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하고 고질적인 식민지지주제가 확대, 강화되었고 일제는 이를 통해서 조선 민중의 다수인 농민을 억압, 통제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인 지주 세력을 식민통치의 유력한 동반자들로 포섭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자작농과 자,소작농민들이 전형적인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등 농업계층의 계급분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전체 조선인 농가수의 3.1%의 지주들이 경작 면적의 50.4%를 차지하고, 지주의 땅을 빌려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빈농이 무려 77.2%가 되었다. 이들 소작빈농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무려 5할이 넘는 높은 소작료를 내고 나면 그해 겨울은 커녕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다. 그들은 봄이 오면 곡식이 떨어지는 춘궁기를 넘기려고 지주나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들의 돈을 빌리거나 도시나 광산 등으로 날품을 팔러 나갔으며 이런 기회도 없는 호남을 비롯한 전국의 빈궁한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아예 고향을 등지고 남부여대로 멀리 만주나 연해주로 정처없이 떠나갔다. 이리하여 1910-21년 사이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12만명에서 51만명으로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은 정치적으로 야만적인 압제와 함께 경제적으로 주체적인 경제 주권국가가 아닌 일제의 단순한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재편되고 전락되어 갔다. 이 외에도 일제는 조선의 전체 삼림 가운데 무려 60%를 국유림 명목으로 강탈하고 조선의 황금어장 대부분과 광산 개발권도 대부분 일본인들에게 넘겨주면서 강탈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암울한 민족적 상황에서 부안 출신의 고평 같은 이는 일찍이 검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험난한 형극의 길인 조선독립운동의 길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 고평은 1884년 부안 진서면 운호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서울의 보광중학을 거쳐 경성관립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경성성지방법원 춘천지청의 검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에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곧 바로 사임했다. 그는 1911년 나철의 대종교에 입교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포교활동과 민족운동을 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에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단, 의군부를 거쳐서 일본군대와 직접 항전을 벌린 군사단체인 고려혁명군을 의병장 출신인 김규식과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철기 이범석 등과 함께 연길현 명월구에서 조직했다. 고려혁명군은 김규식을 총사령으로 하고 고평은 참모장을 맡았다. 고려혁명군은 국민개병제도와 병농일치제도를 채택하고 만주동포들의 교육계몽과 동포들의 자치를 도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고평은 그 후 1925년에는 재만혁명동지회를 조직했고 1935년에는 중국본토로 옮겨 하남성 방공구국연맹 제1군단 참모장과 사령관을, 1940년에는 하북성 군관학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에게는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토지조사 현장.

또한 최두영은 1851년 부안출생으로 1913년 2월 매국노 이완용에게 치죄문을 발송하고 일본천황, 사내총독과 과거 동학농민혁명때 진압군 대장으로 활동했다가 전북지사로 부임한 이두황에게 항일규탄문서를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천황 대정에게 피로 복수하겠다. 천황의 머리를 베어 우리 황제의 앞에 바치겠다.”라는 문구를 사용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수차례 망국의 통분으로 자결을 기도하기도 하였으나 간수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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