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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16-국권회복·조국광복을 위한 국외 독립운동 및 무장투쟁 근거지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훈련 모습.

전회에 살펴본 바와 같이 적지 않은 매국노와 조선의 친일귀족들이 일제의 주구로 살아간 반면에 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조국광복과 독립을 위해 싸우며 살아간 애국지사들과 민중들의 투쟁은 참으로 치열하며 장렬하였다. 일제는 ‘조선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일제가 조선의 왕족이나 친일파 대신들과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막대한 은사금을 내린 목적은 이같이 독립운동은 조선의 엘리트나 양반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천한 상민들-민중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독립투쟁을 천시케 하며 민족과 우리 민중을 이간시키려는 교활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간계에 속거나 빠질 수 없고 민중들과 더불어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여 백절불굴의 독립과 광복의 투쟁으로 떨쳐 일어선 지도자와 독립투사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김가진이 합방 시에 받은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며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중요인사로 독립활동을 한 것도 일제의 위와 같은 선전에 타격을 준 것이기도 했다.

신민회의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애국투사들의 이송광경

일제의 을사늑약 이후 치열한 독립운동을 꿈꾸는 독립투사들에게 국내는 더 이상 제대로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두된 것이 국외, 특히 만주에서의 온전한 광복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양성해서 힘을 쌓아가고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로의 진공작전을 펼침으로써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이었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바, 첫 번째는 1905년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1910년 경술 망국 직후였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보재 이상설(1870-1917)과 우당 이회영(1867-1932)이었다.

이상설 선생

망명 당시에 이상설은 정2품 의정부 참찬의 대한제국의 고관을 역임하고 국제적 시야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을사늑약 때에 백범 김구가 목도한 바에 의하면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였고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울부짖었다’라고 백범일지에 그 광경을 생생하게 썼다. 그가 1906년 4월 18일에 인천과 상해와 해삼위-블라디보스톸를 거쳐 만주 용정촌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국외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 서전서숙을 건립하였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서 네델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와 1908년 8월에는 미국의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을 떠나갈 때에 만 36세였고, 파란 많은 해외의 독립투쟁을 벌리다가 망명지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1917년에 병사하였을 때에 그의 나이 불과 47세였다. 그의 사망 시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동족들이 통곡하고 큰 슬픔과 아쉬움으로 그를 보내야만 했다.

이회영 선생의 체포를 알린 전보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

어린 날, 이상설과 같은 마을 친구이던 이회영은 1908년 여름에 그의 훗날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도 포함된 6형제들과 더불어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톸으로 이상설을 찾아 갔다. 이들 형제들은 합심 협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위해,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 부동산들을 급매로 방매하여 제값도 받지 못하면서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하여 만든 현재의 시가로 하면 거금 600억원 –당시로서는 3원정도의 쌀 한섬을 기준으로 40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의 거금을 마련하여 만주로 떠나가 횡도촌에 자리를 잡았다. 이회영의 집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명상인 10대조 백사 이항복을 필두로 여섯명의 정승과 두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이른바 삼한갑족으로 불린 대표적 명문가였다. 그러나 이회영은 비밀 독립운동 기관인 신민회의 최초의 발기인이었고 상동교회당을 이용하여 전덕기 목사, 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교회부설 청년학원을 신민회의 산실로 만들었다. 신민회는 안창호 중심의 서북 평안도와 미주 지역의 세력과 양기탁의 애국계몽세력을 결집시킨 비밀결사였다. 그리고 이회영, 이동녕, 구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육군 부위 출신의 이관식 등은 1908년 8월 초에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서 압록강을 건너서 서간도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이회영 선생

이상설과 이회영은 많은 토의 끝에 독립운동의 방략을 핵심적으로 정리하였는데 그것은 ‘국내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광복군 양성기지를 만들고, 그를 위한 막대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후 36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다양한 독립운동을 위한 노선들이 나오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큰 전략은 대체로 이 틀과 원칙 안에서 진행되었다. 즉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론>이 망명정부 수립으로, 광복군 양성이 <독립전쟁론>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수많은 만주와 노령 혹은 중국대륙의 태항산과 연안 등에서의 무장 독립군들의 투쟁 및 상해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양성했던 것도 모두 이같은 큰 원칙과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회영은 남만주의 유하현 횡도촌과 삼원보 추가가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으며, 이곳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1월5일 경상도 안동의 명문가의 석주 이상룡(1858-1932)이 새벽에 일어나 가묘의 신위들께 절을 하고서 그의 나이 52세로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떠나갔다. 전통적인 영남 명문중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이상룡의 망명은 영남 유림과 양반사회에 던진 충격과 영향은 지대했다. 차후에 살펴볼 수 있겠지만, 전통 유림의 고장, 안동이 널리 알려진 이육사 시인을 비롯한 훗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배출한 “조선의 모스코바”로 불리운 놀라운 변화의 시작이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 이상룡의 망명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1910년 11월 27일에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찹석하는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105명이 기소된 세칭 ‘105인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애국인사들이 무려 600여 명이었고 대부분 서울의 윤치호, 양기탁, 평북의 이승훈, 평양의 양국태, 황해도의 김구 등 신민회원들이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는 이 사건의 극심한 고문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에 대한 보안법 위반혐의의 판결문은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자본력이 있는 다수 인민을 서간도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신영토로 삼고...학교 및 교회를 세우고...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문무쌍전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105인 사건’의 체포와 실형 언도로 인하여 신민회가 준비했던 독립운동의 방략이 커다란 차질을 빚고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발되기 직전에 만주의 횡도촌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유력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미 미리 망명하여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은 그나마 불행 중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무관학교를 개교한 이회영, 이상룡등은 1911년 3월부터 삽과 곡갱이로 고원지대를 평지로 만들며 내왕 20리의 산길과 돌산을 파 뒤져서 오직 어깨와 등으로 돌산을 깨고 나르는 중노동의 신축공사를 하여 6월에 신흥무관학교는 새로운 교사를 완성하고 낙성식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18세에서 30세 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그들에게 엄격하게 요구된 것은 무엇보다도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고 북한의 세심한 지리를 포함한 한국의 지세를 주의 깊게 연구시키면서 특히 국사와 군사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무관학교의 교육내용은 학과 20%, 교련 20%, 민족정신교윢 50%, 황무지 건설20%의 비중으로 이루어졌다. 드디어 1911년 12월 신흥무관학교는 40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만주의 구석 오지인, 겨울이면 삭풍 몰아치는 삭막한 합니하 심산유곡에서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여 독립무장투쟁의 꿈으로 교육 훈련을 받은 젊은 청년들의 어깨와 심장에 상실당한 조국광복과 민족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이들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외에도 추가가와 유하현 고산자 하동, 통화현 쾌대무자 등지에도 설치했던 본교와 분교등을 통해서 1920년 8월에 폐교가 될때 까지 약 3,500여 명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도가 배출되었으며 이들이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적 지도자와 인물들이 되었다.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협력하여 이루어낸 일본 정규군 1,200여 명을 사살한 빛나는 청산리대첩 승리는 김좌진, 홍범도 장군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통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배출된 독립군 장교들의 지휘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시 파호문 밖에서 결성되어 일제를 공포와 경악에 빠트리게 되는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지휘한 ‘의열단’도 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모임과 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같이 장렬한 해외, 특히 만주에 있어서의 무장독립투쟁의 정신과 사상적 배후와 모체가 있었으니 그것은 을사오적을 암살, 처결하려했던 홍암 나철(1863-1916)이 단군 국조를 뿌리로 조국광복을 위해 창도한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당시 만주에 무려 30만의 세력으로 강렬한 민족주의의 횃불로 국외 만주의 무장독립운동과 투쟁을 종교 사상적으로 이끌고 뒷받침했다.

3천의 반일 제자군을 양성한 간재 전우 선생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부안에서는 아직도 주자학을 신봉하고 중국을 경모하는, 호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던 거유인 간재 전우(1841년-1922)가 일제의 조선침탈과 병합에 분노하여 1908년 고군산의 신시도와 위도의 신왕등도를 떠돌다가, 마침내 72세 때인 1912년 부안의 계화도에 정착하고 제자 3천명을 길러냈다. 그의 신념이 조선의 독립투쟁과 근대화를 감당할 수 없는 한계와 비전투성이 뚜렷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아부하지 않는, 반일의 신념을 지닌 선비적 지사를 양성하여 훗날 민족법조인으로 헌신한 가인 김병로와 민족교육인으로 활동한 운재 윤제술 등을 비롯한 숱한 제자들을 대규모 간척 전의 척박했던 절해의 고도와 같던 계화도에서 양성했다. 비록 한계가 있었어도, 절대로 친일은 아닌, 비록 소극적일망정 도학(道學)으로 국권회복을 꾀한 나름대로의 고절하면서도 의미있는 반일적 삶이었다. 조선의 내부에서의 ‘내적 망명’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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