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계 가는 버스를 타고 내변산을 들락거렸다. 사자동의 닭요리 하는 음식점에는 교사들이랑 갔던 기억이 있다. 백천내에서 어병을 놓아 물고기 잡던 기억도 있다. 그곳 유씨 재실에서는 모임도 잦았다. 지금이야 부안댐이 생겨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이면서 물놀이는 옛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내변산으로 들어갈 때 버스가 힘들게 오르던 고개가 우슬(牛膝)재다. 쇠무릎, 쇠물팍이라고나 할까. 우슬재를 넘으면 이곳에는 유동, 청림, 노적, 거석, 서운 등 5개 마을이 산 중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우슬재의 왼쪽 등성이를 타고 걸으면 창수재를 거쳐 상서의 내동에 닿을 수 있고 오른쪽으로는 어수대 위로하여 변산의 쇠뿔바위 등으로 향한다.
  사진에서 보는 곳은 하서면의 용와동((龍臥洞) 마을이다. 찻길을 따라 우슬재를 오르다 밑을 보면 눈 덮인 이 동네가 보인다. 버스가 띄엄띄엄 하루에도 몇 대 없을 때, 청림 사람들은 변산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하서면 섶못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구암리, 풍남동, 용와동, 수련동, 우슬재를 넘어 청림을 향해 걸어간다. 용와동 마을에서 우슬재를 오르는 지름길을 이용한다. 정상에 거의 닿을 무렵 오른편에 돌무더기가 있다. 성황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가면서 돌을 하나씩 던져 쌓아놓았다. 돌을 떤지면서 개인의 소원을 절실하게 빌었을 것이다. 최근에 필자도 이 돌무더기를 확인했다.
  우슬재는 변산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이다. 한국전쟁 때는 산 속 사람들의 사정이 밖과는 달리 더 어려웠다. 견디다 못한 청림 사람들은 이 우슬재를 넘어와서 수련동이나 용와동에서 피난을 하기도 했다. 거석마을의 김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3살 6살 아이를 업고 가족들이 밤에 몰래 우슬재를 넘어 상서 장다리에서 3년 정도 살았다. 시누이들이 많아서 도움을 받았다. “인공 뒤집어 졌을 때(9.28수복) 나갔다”고 했는데 키우던 소 한 마리도 놓고 나갔다. 산 중에서는 소 한 마리만 있어도 부자인데,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누가 잡아먹었는지 소를 찾을 수 없었다.
  변산의 빨치산들은 청림 사람들에게 같이 살자고 했고, 경찰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부안 읍내 정도는 가서 피난해야 안전했겠지만 산 중에 살다보니 대처에 아는 사람들도 없고 방값하며 입에 풀칠할 방법도 없어 위험한 산 속 생활을 해야 했다. 산 속 마을에서 살다가 창수재에서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빨치산들이 민간인을 데려다가 밤에 보초를 세웠는데, 경찰의 토벌 때 몰려 어려움을 당했다. 청림의 새재에서도 네 명이 죽었는데 그저 순박하게 농사짓던 사람들이었다. 네 명이 누군가는 의견이 갈리지만 나무개떡 시아제도 죽고 새재 양반도 죽었다고 70년 가깝게 지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할머니들은 얘기한다.
  우슬재만 넘어 피했어도 살았을,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증오 사이에서 죽어갔다. 그래서 우슬재를 오르내리던 산 중 사람들은 돌을 던지면서 천지신명께 소원을 빌었을까.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는 목숨 걱정이나 먹고사는 문제로 어려움이 없기를. 자식들이 도시에 나가서도 직장 잡아 굶지 않고 잘 살기를. 서로를 적대시하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오지 않기를 소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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