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출처 / 부안군지

1973년 신시장이 헐렸다. 판자방 대신 철근과 콘크리트로 뼈대와 벽을 세우고 초가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시장 규모도 360평에서 762평으로 넓어졌다. 신축 전에는 67개동의 점포가 각각 떨어져 있었지만 신축하면서 기다랗게 늘어선 건물 4개동이 지어졌다. 지금 전통시장의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공사기간은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의 저력이기도 했겠지만, 장사로 생계를 꾸려가는 상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공사는 11월에 시작해 이듬해 1월 끝났다. 그 기간 상인들은 시장 주변이나 읍내 거리에서, 가게 한쪽에 세를 얻거나 노점으로 장사를 이어갔다. 끼니 챙겨 먹기도 힘들던 시절에 상인들이 잠시라도 손을 놀릴 여유는 없었다.
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장 신축 당시 점포수가 현재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회상한다. 지금의 점포 하나를 예전 같으면 네 명이 장사를 했다. 어지간해서는 손을 놓지 못하는 상인들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지만, 상인들은 덤덤하게, 예사로 말한다. “거기도 들어갔어” 장사가 시원찮거나, 세월에 힘이 부쳐 하나 둘 들어간 자리를 한칸 한칸 인수해 트고 넓힌 것이 지금 점포의 크기다. 노점에 후생상가까지 포함하면 현재 상인 수가 232명이지만, 7~80년대에는 상인 수가 두 배정도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상인들은 당시를 짐작했다. 예전에는 1.5평짜리에서 오도카니 앉아 장사를 했을 테니 그 말이 곧이 들린다.
70년대 당시 부안 인구는 16만여명이었다. 80년대에 들어 급격히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상인들은 그때가 시장이 번창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사람이 버글버글 했어. 여기 통로를 줄 서서서 지나갔으니께.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개굴개굴 소리 같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힘들어서 전깃불이 두 개로 보였다 세 개로 보였다 할 정도로 어지러웠어.”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부안읍도 빠르게 개발되고 전통시장도 부안 상권의 중심으로 성장했지만,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 역시 산업화로 인한 것이었다. 산업화가 정점에 이를수록 젊은 사람들은 눈에 띄게 대도시로 빠져나갔다. 90년대 부안 인구는 10만명으로 급감했다. 그래도 상인들은 그럭저럭 재미가 좋았고 말한다.
“옛날에는 뱃사람들이 나오면 술 한 잔 안 먹고 그 돈으로 물건을 많이 사갔지. 한 번에 수백씩 썼어. 보통 사람도 갯벌에서 생합을 캐면 하루에 몇십만원도 벌었고. 그때는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썼어.”
전통시장은 갯벌이 내어주는 풍부한 어자원의 혜택으로 한동안 풍요를 이어갔다. 하지만 새만금(1991~2010)방조제 사업으로 동진강 하구에서 변산면 대항리까지 바닷길이 막히면서 전통시장도 급격하게 줄었다. 산업화로 젊은 사람들이 떠났다면, 새만금은 한 집씩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시장을 찾는 발길도, 시장을 지키는 이들도 줄었다. 시장 안에 있던 중물점, 이발소, 미곡상회, 떡방앗간, 찐빵·도너츠 가게, 농악사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는데 상인들은 그 무렵이라고 어렴풋한 기억으로 얘기한다.
전통시장에 위기가 찾아올 때 현대화 사업이 진행됐다. 주차장이 넓게 생기고, 점포 시설이나 소방 시설도 수차례 걸쳐 개선했다. 벽화나 간판도 정비하고, 문화관광형 사업으로 상인들의 복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전통시장은 현대화가 됐고 상인들의 여건은 좋아졌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
90년대 중반까지 슬레이트 지붕이 낮아 여름이면 시장 안은 유독 더웠다. 음식 냄새, 흥정 소리, 말 그대로 시장통이었다. “시장 안에만 있다 보면 답답해서 잠깐씩 바깥에 나갔다 왔지. 나가서 바람 쐬면 숨이 탁 트이더라구.”
사람이 줄 서서 지나갈 정도로 북적거리던 그 시절.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한다지만, 상인들은 그 시절을 얘기할 때마다 큰손이라도 맞는 듯 얼굴빛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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