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서민경제의 중심이자 부안 군민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부안전통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본지는 이번호부터 ‘부안 전통시장’ 기획 시리즈를 20여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지역경제도 함께 살아나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말

1983년 부안 상설시장의 모습.   사진 제공/부안문화원

우리의 옛 장은 이곳저곳을 떠도는 장돌뱅이 상인들이 장날에 등짐을 풀어놓는 곳이었다. 물자는 귀했어도 상인들이 함께 풀어놓는 이야기로 장은 넉넉했다. 흥성거리는 장날 구경에 아이들이 신이 났지만 점잖을 빼는 어른들도 실은 그 못지 않았던 것 같다. 필요한 물건을 다 사고도 쉬이 장터를 떠나기 어려웠던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장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로 새벽밥 먹고 왔다가 해거름에나 돌아가기 예사였다. 옛 사람들에게 문화공간이었던 장은 200여년도 넘는 시간을 이어왔다. 50년대부터 산업화를 거치면서 매일장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십수년 전까지도 사람들은 장날을 찾았다. 대형마트가 자본의 힘으로 편리성이나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흉내낼 수 없는 무언가를 장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안읍 장시의 유래

부안읍 장시에 대한 첫 기록은 동국문헌비고(1770년)에 전한다. 객사(지금 군청) 앞에서 동쪽 돌팍거리 일대에 2일과 7일 작은 장이 섰고, 객사 밖으로는 부안초등학교 뒤 화성탕 골목과 신용협동조합 일대 4일과 9일에 걸쳐 큰 장이 섰다. 모두 5일장으로 2·7일은 윗장, 4·9일은 아랫장으로 불렸다.

비슷한 시대에 쓰여진 임원경제지에도 부안읍의 장시를 윗장과 아랫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래되는 물품이 미곡, 준치, 오징어, 농어, 숭어, 생합, 조기, 홍어, 뱅어, 망둥어, 젓갈류 등이 눈에 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부안군의 특성을 보여주듯 수산물이 많았다.

이후 150년 동안 부안읍의 장시는 그대로 이어졌다. 1920년 기록에 쌀, 목탄, 소(牛), 생어(生魚), 목면, 엽연초 등이 장시 물품으로 거래됐고 상인들은 군산, 전주에서 필요한 물건을 떼다 읍내에서 팔거나 태인, 신태인, 고부, 줄포에 서는 장을 오갔다. ‘장돌뱅이’라 불리며 이곳저곳을 오가야 했던 옛 상인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아랫장에 점포가 늘면서 매일장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해 2·7일에 열리던 윗장은 서서히 사라지고 아랫장은 5일장의 모습을 지니면서 시장으로 성장했다. 이후 1954년 지금의 전통시장 자리에 목조 건물을 짓고 신시장이 들어선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신시장이 구시장과 부안읍의 상권을 경쟁했다. 50년 넘게 시장을 지키고 있는 상인들의 얘기로는 60년대까지만 해도 구시장의 상권이 더 좋았다고 한다. 그때 신용협동조합 일대와 구시장에 새벽이면 도깨비 시장이 열렸는데 먹거리, 반찬거리를 팔았다. 부안읍의 식당 상인들이 모두 찾아와 식재료를 사갔다. 신시장 상인들도 도깨비 시장에 물건을 내어 팔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정부가 각 시골에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신시장의 건물도 1972년에 철근과 시멘트로 신축하게 된다. 근대화가 이루어진 신시장을 기준으로 뒤쪽 구시장은 사라지고 앞쪽은 상권이 넓혀지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부안장은 허천난 장’

돌만 갔다놔도 팔린다는 시장이었다.

 

1973년에 신시장 신축 건물이 완공됐다. 67개동이었다. 신축 기간 동안 상인들은 거리의 가게를 빌려 장사를 했다. 다시 입주할 날을 기다리며 온갖 고생을 견뎠다. 하지만 입주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누구는 더러 가게를 떼이거나, 쪼그라들기도 했다. 그래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던 시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시장 앞쪽은 묘지, 산, 개천, 수렁이었다고 말한다. 해질녘에 시장에 다녀갔다 도깨비에 들려서 새벽까지 산길을 헤맸다는 이야기나, 지금 서림고 자리에 있던 큰 방죽 근방에서도 도깨비를 봤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던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시절이었다.

독재정권 하에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됐지만 물자는 여전히 귀했다. 품목에 상관없이 모든 점포가 물건 떼어다 놓기 바빴다. 포목점에 물어보면 비단이, 제수용품점에 물어보면 제수용품이 인기품목이었다는 말을 상인의 수완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 70년대에 들어서 ‘부안장은 허천난 장’이라 불릴 만큼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때 신시장에는 대장간도 있었고, 기름집, 농악사, 중국집, 술집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모두 재미가 좋았다. 파장 때 남는 것이 없을 정도로 ‘허천나게’ 팔려나갔다. 돌만 갖다놔도 팔린다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지만 상인들은 고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소뼈는 절구에, 고기는 도끼로 찍어 팔았다는 정육점은 고기를 달아온 날엔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고기가 상할까봐 처마에 걸어놓고 지키느라 가게에서 잠을 자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난방 시설이라 해봐야 연탄난로나 곤로가 전부였다. 곤로는 기름 값이 아까워 넉넉한 가게에서나 한두 집 썼고 대부분의 상인들은 연탄난로를 끌어안고 추위를 견뎠다. 신시장이 들어선 이후 화재 한번 겪지 않았던 것을 보며 상인들은 복 받은 땅이라고 말한다. 당시 군청에 내던 입주금이 중앙통 두 칸짜리가 쌀 열 짝 정도였다는데 해마다 여지저기서 빚을 끌어와야 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한 푼이라도 아껴야 가게도 이어나가고 집안을 돌볼 수 있었다. 연탄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기에 상인들이 얻은 복이었을 것이다.

또 부안장은 사돈네 장이라는 말도 있었다. 한집 건너 아는 사이라야 물건이 팔렸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그만큼 텃세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옛 시골이나 시장의 생리가 어딜가나 매한가지겠지만 부안의 시장은 더욱 심했다고 한다. 토박이가 아닌 상인들은 풀 쑤는 날이 예사였고 손 털고 떠나는 이도 많았다. 그래도 손님 한두 명을 용케 잡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이 지금까지 신시장에 점포 한두 칸을 지켜온 상인들이다.

이러한 상인들의 옛 이야기와 오늘의 모습들을 통해 신시장, 지금의 전통시장의 내일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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