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의 깊은 골에는 여러 마을들이 있었다. 산속 마을들은 60년대에 많이 사라졌고 부안댐이 건설되면서 계곡 주변의 마을들은 수몰되었다.
  상서면 청림리 유동마을에는 같은 마을이면서도 창수동 · 남선동 · 남수동이라는 작은 뜸의 이름으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있다. 차가 오가기도 어려운 이곳에는 나그네를 위한 주막들이 있었다. 창수동 들입의 오른쪽에 주막이 있었고, 진골에는 지금은 마을 회관이지만 이곳은 원래 주막이었다.
  유동 마을의 창수동(蒼水洞)은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지금도 옛 지명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이야 아래뜸에 두 가호 위뜸에 두 가호니 네 집이다. 그 중에 한 집은 비어 있다. 이 마을에 저수지가 생기고 동네를 지난 정상에는 창수재라는 고개가 있어 상서면으로 내려가는 길목이 되었다. 
  창수동은 물길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골이 길다하여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개창시 창시골’이라고 놀림 받았다. 개의 창자가 길다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물통골이 있어 물이 많이 나오고 위뜸의 산 쪽으로는 논이 있어 농사가 가능했다. 주변에 폐사지인 절터 시암은 물이 차갑다하여 얼음박골이라 불렀다.
  청림에 사는 학생들이 상서나 부안으로 나갈 때는 아래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집 앞 거르막에 자전거를 놓고 산길을 걸어 창수재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내동에 닿고 소재지인 우덕으로 나갈 수 있었다.
  20여 년 전에 창수동에 ‘가는골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다섯 집이 수몰되었다. 이곳에 저수지를 만든다고 무슨 물이 차겠느냐는 말들도 있었지만 만들어놓고 보니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넘실거렸다. 이 물로 유동, 청림, 노적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창수동을 찾던 몇 년 전, 눈이 많이 내리던 12월 말이 기억났다. 청림교회 봉고차가 이 길을 오르는 것이 보였는데 나중에 들으니 위뜸의 할머니가 교회를 다녔던 모양이다. 봉고차를 따라 가던 필자의 차는 오르막에서 거의 정상까지 오르다가 눈길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차를 후진시켜 도로 옆에 놓고 걸어서 마을을 찾아 나섰다. 저수지를 지나자  집이 보였다. 옛 동양화 달력이나 어린 시절 성탄카드에서나 봄직한 마을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눈 덮인 집과 나무들, 동네 길을 살피며 걷자 사람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데 개가 짓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어느 날은 늦은 밤에 혼자서 창수재를 넘어 마을로 오는데, 부엉이 소리도 들리고 무섬증이 확 들었다고 한다. 골짜기를 뛰다시피 어둠을 헤쳐 오니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이 흥건했다. 내일 당장 학교는 가야하는데 옷은 빨 수도 없으니 걱정이었다. 다음날 아침밥이 익어가는 가마솥의 소드랑께에 옷을 말렸다는 얘기도 듣는다. 이곳에서 생산된 메물(메밀)을 지게에 지고 주산 돈계로 나가서 바꾼 쌀 80키로를 지게에 지고 눈 쌓인 창수재를 넘었다고 한다. 어렸지만 그 때만 해도 몸이 짱짱했으니 가능했다는 얘기도.
  춥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 없는 사람은 여름이 좋다는 말도 있고. 이렇게 눈이 쌓이면 먹이를 찾아 헤맬 산 짐승들. 옛 어른들은 먹이 찾아 민가로 내려온 짐승들은 잡지 않았다는 말도 남겼다.
  마을을 떠나면서 궁금함이 멀어지는듯해서 가던 길 멈추고 다시 한 번 추억 같은 마을을 뒤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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