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 평가는 어느만큼 객관적일 수 있을까? 특히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1337~1453)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1337~1431)는 19살에 마녀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프랑스 정부는 전쟁이 끝난 3년 후에야 그녀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살아 있을 때는 그녀를 버렸고 죽어서야 복권시킨 것이다. 또한 일곱 번의 재판으로 잔 다르크를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음으로 몰고 간 교회는 1920년에 가서야 그녀를 성녀로 시성했다. 이는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500여년이 지나서도 객관적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이다.
  부안 지역 독립운동가인 김철수 선생도 평가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라는 일방적인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철수 선생에 대한 평가는 1999년 정부 기관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자료집 『지운 김철수』가 간행되고, 2005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면서 평가에 있어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지금도 상대방을 용공이나 좌익으로 옭아매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취한 사상은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초기 사상운동의 산증인이라 평가되는 김철수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던 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상운동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어려웠던 시절이 계속되었고, 80년대엔 소장파 연구자들이 소수의 무력적인 투쟁 중심의 운동가들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김철수 선생은 말년에 암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경황이 없었던 때에도 자신이 쓴 자료를 숨겨서 병원으로 가지고 갔다. 몇 차례 자료를 분실하면서도 계속 자료를 남기려 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 너무 왜곡되고 자의적인 주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료를 숨기는 것이었다. 1960~80년대의 정치 상황은 남북문제가 대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자유로운 글쓰기나 말하기도 통제되던 암울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료를 받은 딸 용화는 긴장이 되어서 다른 일을 못할 정도였다. 병원 벽장에 옷가지로 덮어서 몰래 숨겨 놓기도 했다.
  김철수 선생은 역사자료를 남기면서 “고의적으로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안 하겠고 들은 말은 들은 대로 내가 책임지지 않을 말은 미리 얘기 하겠다”고 역사 앞에서 진솔한 입장을 보여, 삶을 통해 민족의 고난에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의 역사에 대한 당당함을 읽을 수 있다.
  여전히 그의 평가는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지 1년 후에 그의 묘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섰다. 그러나 비석 뒤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비였다. 이 비석에는 남과 북이 통일되어야 비로소 그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를 세운 사람들의 깊은 기다림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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