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이고 있는 부안동학 농민군 대장 김기병의 묘소

필연적인 역사의 운명적인 엄중한 때-카이로스와 ‘주인과 노예의 생사를 건 판가리 싸움’에서 승리를 놓치면...‘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가고 을미적 병신되리’...<파랑새>의 노래처럼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우금치 패배 이후에 처절하게 패배하고 좌절되면서 조선은 예상대로 급격하게 일제의 식민지화의 수순과 과정을 밟아간다.

과연 바로 갑오혁명 패배 다음해인 을미년 1895년에 을미사변의 이름으로 이른바 국모인 민비 시해사건이 경복궁 안방에서 자행되며 동학혁명 패배 후 10년이 되는 1905년 을사년에는 보호조약으로 속국이 되고 1907년 정미년에는 군대해산까지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이러한 식민지 노예의 운명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일제에 대한 수많은 의병들의 봉기와 전투가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만 본다면 아마도 제일대 최초의 이 땅의 거대한 참된 의병들은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동학농민혁명군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하게도 만약 그들이 척왜양창과 보국안민의 깃발로 일본군과 관군을 이겨 승리하였다면 식민지 노예의 역사가 아닌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개혁과 나라의 역사로 나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의 의병 체포 포고령.

부안 대접주 김낙철의 북접노선과 비폭력행태에 기인하여 부안지역에서 피를 부르는 항쟁은 제한적이었을 지라도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 반제국주의적 대의와 투쟁에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떨쳐 일어나 싸운 이들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 부안읍의 장령급 체포자만 9인이었다.

1895년 2월1일에 체포되어 총살된 우제 김기병은 매우 뚜렷하고 상징적인 부안농민혁명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65세의 고령으로 동학농민군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기병은 1831년 상서면 내동 출생으로 후에 장전 거주 부령 김씨의 중심이 되면서 장대한 기골에 준수한 용모로 효성이 지극하고 강직한 의지와 비범한 우국충정에 근면으로 큰 재산도 일군, 일찍이 명망이 높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그는 떨쳐 일어나 하서면에서 500명의 농민군을 취합하여 해창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혁명군으로 무장하며 화승총으로 훈련시킨 민병을 거느리고 부안 기포의 두목으로서 부안관아를 접수하였다. 그 후 농민군의 백산 총집결과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 점령 및 공주 우금치 전투에도 함께 하다가 패퇴 후에 부안에 잠입하여 지하농민혁명운동으로 동지를 규합하며 무기를 버리지 않고 저항을 하다가 밀고를 당하여 일본군의 습격으로 체포되어 1895년 2월 1일 부안읍 동문-현 동중리-밖의 형장에서 부하 8명과 함께 비통하게 총살되었다. 그의 삶과 투쟁을 기려 그의 혁명군대장묘비가 상서면 개암사 입구에 세워지고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특별법’으로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동학혁명 당시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과 부안의 김낙철 등도 거개가 40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기병은 당시 회갑이면 극노인으로 치부되지만 연배를 초월한 영원한 민중혁명가의 상징일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폭도로 칭한 조선의병 토벌일지.

동학농민혁명의 패배와 더불어 일본은 청일전쟁에 뒤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의 합병과 식민지경영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1895년 10월에 민비시해사건이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 기획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잠입한 일본낭인들에 의해서 자행되고 결국 이러한 만행에 많은 이들이 의병활동에 떨쳐나서게 된다. 그러나 전라도 호남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쓰나미와 패배의 엄청난 후유증으로 많은 지도자와 인물들을 이미 그 뿌리채 뽑히운 참담한 상황이어서 을사년, 특히 정미년에서야 의병참여가 크게 가능했었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특히 단발령이 발표된 후에 의병이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이천의 박준영, 선산의 허위, 강릉의 민용호, 홍주의 김복한, 산청의 곽종석, 문경의 이강년, 장성의 기우만 등이었다. 이중에서도 원래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의암 유인석은 지구전론과 북계지역인 백두산과 그 주변 고을을 중심으로 독립전쟁 근거지를 구상하였다. 또한 이강년은 원래 무과출신으로 구식 조선군대의 맹장이었다. 그는 문경에서 봉기하여 싸우다가 전투 중에 중상을 당하여 체포되고 1908년 교수형의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을미의병은 존왕양이론(尊王洋夷論)에 철저한 위정척사적이며 임금에 충성하고자 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림문화와 중화적인 가치관 및 주자학적 윤리관과, 단발로 상징되는 개화를 야만시하는 반개화의식, 국모 시해에 대한 대일 복수의식으로 전통적, 보수적인 세력의 반개혁적 노선이었다. 이들은 유림층이 중심이 된 의병으로 다수 민중인 농민층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그 전투능력이 취약하였다. 또한 원래는 사회의 지배층인 유림과 피지배세력인 민중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발생도 하였는데 그 예로 유인석 부대에서 포수 출신의 혁혁한 공을 세우던 선봉장 김백선을 소위 양반불경이라는 이유로 처형한 사건도 있었다.

이들에 이어서 무력항일운동 제 2기인 을사의병이 1905년에 출현하였다. 이는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후에 다시 일어난 의병운동으로 을사조약 반대, 을사오적과 친일내각 타도가 그 목표였다. 을사오적 대신 중 박제순은 우금치전투 당시에 충청감사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외교권을 상실하게 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이제는 민중과 양반유림을 중심으로 을사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을미의병의 감정적 차원의 국모시해 보복에 대신하여 을사의병은 상실당한 국권회복이 기본과제였다. 의병장들로서는 원주의 원용팔, 경기도의 이문호, 전북의 최익현, 임병찬 전남의 백낙구, 경남의 신돌석, 영천의 정용기, 황해도의 이진룡 등이었다. 또한 민종식은 을사조약 체결 후 관직을 버리고 1906년 3월 의병을 일으켜 충남 정산에서 거병, 홍주의 이세영, 안병찬과 합세하여 오늘날의 홍성인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대치하여 싸웠다.

구한말 독립무장 항쟁에 나선 조선 의병들.

구한말, 강직한 신념과 상소로 유명한 인물인 면암 최익현은 1906년 4월 포고격문을 발하고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거의하며 태인 관아를 점령하고 순창에 입성하여 관군과 대치하였으나 전투를 중단, 스스로 포로가 되어 1907년 1월 대마도에서 유배 중에 73세의 고령으로 단식 중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의병운동에 특히 1849년 부안출생인 고치범이 그의 명을 받아 팔도사민 창의포고문을 작성하고 전국에 살포하였다. 면암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진을 일으킬 때 고치범은 수하에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순창에서 일군과 교전하였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종사관의 직으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국권회복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 수감 중에 발병하여 1914년에 사망하였다.

훗날 출현하는 홍범도 이전의 평민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은 1906년 3월 의병을 일으켜 경상, 강원도 접경에 있는 일월산을 거점으로 평해, 울진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세인들은 신돌석을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그의 의병의 수는 약 3000여명에 달하기도 하였으나 1908년 11월에 암살당하였다. 이 같은 을사의병투쟁에서 전직관료들을 포함한 양반출신과 함께 평민계급출신 의병장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등장과 더불어 이후 민중이 의병의 주도세력으로 명확하게 자리잡아갔다. 심지어 머슴 출신의 의병장도 나타나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의 의병의 봉기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상실된 국권회복에 있었고 따라서 전투능력 확보에 노력하였으며 수성전에서 적극적인 유격전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이들은 포수와 포군을 주력으로 한 전투적인 부대로 편제하여 일본군의 주둔지와 일본인 거류지, 통신시설을 공격하였다. 

의병들의 화승총 무기.

그러나 을사의병에는 민중의 새로운 등장과 함께 아직 다수의 전통적 유림들이 참여하였으며, 그들은 여전히 계급적 한계가 있었다. 그러기에 의기는 높았을지라도 그들의 유교적, 봉건적 한계로 의병전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고 본질적으로 비전투적이며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 극명한 예로 전투 중에 부친상을 당한 상황에서 의병대장인 이인영이 ‘효를 명분으로’ 전투를 중지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관군이 왕의 군대이기에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는 명분으로 전투를 중지하고 포로가 되는 최익현의 경우들처럼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온전한 식민지가 되기 전 단계에 다시 1907년에, 다음 호에 다루게 될 안중근도 포함되는 보다 전투적인 마지막 정미의병의 제 3기의 항일전쟁이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식민지 노예의 운명 직전에 처절히 전개된다. 그리고 이 의병운동에는 부안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조국독립을 위한 의병운동과 투쟁에 함께 하게 된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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