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놈의 위도만 요렇게 줄 창 써댄 당가?”라는 불만 섞인 얘기를 들을 만도 하다. ‘부안의 밥과 꽃’을 쓰면서 ‘위도 당숲’과 그 뒤의 ‘도장금 해수욕장’까지를 생각하니 일곱 번째 위도에 대해 얘기한다. 변명이라면, 올해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는 곳은 위도와 백산의 죽림리 · 신평리, 상서의 청림리, 하서의 비득치와 월포, 대교 등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 지역을 더 돌아보고 지역 사람들을 만나 자주 얘기를 나누는 편이다.
올해는 학생과 학부모를 안내하여 위도를 몇 차례 다녀왔다. 부안교육지원청에서 작년부터 시작한 지역의 마을들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봄의 위도는 처음이었다. 주로는 여름이나 겨울에 갔던 기억이 있었는데. 4월 15일에 도착한 위도는 섬전체가 꽃 천지였다. 벚꽃, 동백, 진달래가 한 바탕이다. 함께 간 어른 한 분은 “진달래만 보면 가슴이 설레고 터질 것 같다.”고 했다. 그의 시심(詩心) 가득한 정서를 위도를 다녀 온 뒤로도 오래도록 기억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위의 사진은 사진작가 허철희 선생이 올 4월 15일에 찍었다.
숲도 좋아라, 위도의 진리 당숲은 몇 백 년 동안 사람 손이 타지 않았으니. 그러나 위도가 그저 아름답기만 할까. 내가 70년대부터 만났던 벌금의 신병준은 아버지가 세 살 때 동네 분들하고 배를 타고 나가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단다. 필자는 그에게서 몇 번이나 슬픈 가족사를 들어도, 전에 들은 얘기라는 말을 못했다. 어린 날 아버지의 부재는 외로움과 질시와 혹독한 가난이 따르는 아픔이었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위도에는 한날 제사인 집이 여럿이다. 1959년의 통도호 사건이 그렇고 1993년의 서해훼리호 사건도 그랬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은 승선 인원 362명 중에서 70명이 구조되고 292명이 사망한 해양 사고 중에서도 큰 사건이었다. 이 중에는 위도 주민도 58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올 7월 달에 위도초등학생들과 위도 답사를 했을 때, 여학생 하나가 위령탑 이름 중에 큰 아빠 이름이 있다며 오래도록 위령탑을 매만지고 있었다.
서해훼리호 위령탑은 시름금과 진리 사이에 있는데 바다 쪽에 깊숙이 묻혀 있다 보니 마음 쓰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위도의 아픔이요 감추고 싶은 역사이며 마음으로 삭인 억울함일 수도 있다.
필자는 위도를 생각하면 감상에 빠져든다. 객관성을 잃을 수 있는 이런 감상은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에게는 피해야 할 독(毒)이라지만 어쩌랴. 위도만 생각하면 설레고 한번 가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달빛을 머리에 이고 위도상사화를 보면서 걷는 ‘달빛 축제’를 위도 주민들이 만들어냈다. 섬 속의 달만 생각해도 가슴이 얼얼한데 거기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상사화(相思花)라니. 수 만년의 역사를 간직한 역사의 땅, 여기에 희망을 벼리는 주민들, 위도에 희망의 봄꽃이 잔인한 대지를 뚫고 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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