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에서의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곳

갑오년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제 2차 기포(起包)를 하자, 이에 호응하여 전국 각처에서 대규모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전후, 왕과 정부의 청국에 대한 원병 요청으로 청국이 천진조약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해 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였다. 동시에 일본군은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오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일촉즉발의 전운이 짙어져 갔다. 국내정세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이 집강소에서 통치하며 오직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켰고, 일본군과의 필연적인 대결은 오직 시간문제였음으로 그들은 다시 봉기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우선 충청도의 수부 공주를 함락하고 서울 진격의 북상길에 나설 계획이었다.

반면에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북접은 소극적 입장을 고수하며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전봉준과 남접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권유로 오지영이 조정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대의로 남, 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로 손병희 지휘하의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청산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하나로 만나서 공주로의 북상을 시도하게 되었다.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해 있을 무렵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도 항일전이 벌어졌는데, 목천 세성산, 수원, 홍천, 공주, 옥천,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동학접주들이 봉기하였다. 한편 남,북접의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을 충청감사 박제순이 정부에 보고하고,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북상준비와 북접과의 행동통일을 위한 이유는 나름 있었지만, 동학농민군의 패인의 하나로도 지적되는 삼례에서 무려 한 달을 지체하며 머물다가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 밖에 북접의 동학농민군 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해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부대는 나주에, 남원을 뒤늦게 출발한 김개남부대는 아직도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체포된 동학농민군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김복명의 동학농민군을 서전에서 참패시킨 일본군과 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일본군은 공주의 길목인 우금치와 견준봉에, 관군은 이인과 효포에 진을 쳤다. 전봉준은 서울진격을 위한 중요한 관건인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급히 북상, 합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1일 동학농민군은 웅치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양군 사이에는 혈전이 벌어지고 끝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6, 7일간 머물면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관군은 쫓겨서 우금치의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여 일본군이 사실상 모든 전투를 통제, 지휘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 일본군 부대의 잔인한 학살극
근대 군대의 훈련을 거친 일본군대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건곤일척의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산악전에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농민군의 무기는 거개가 화승총이나 조총 혹은 천보총과 죽창으로 무장한데 반하여 일본군의 무기는 대포와 게틀링 기관총과 일군병사 하나가 무라타총으로 2-300명의 농민군을 해칠 수 있는 연발식 라이플총, 스나이더 소총이 농민군의 열악성에 비하여 가공할 수준으로 동학농민군을 처참히 도륙하였다. 또한 그 위에 일군과 관군의 식량이나 모든 보급이 장기전을 대비하여 제대로 된 것에 비하여, 비록 그 사기는 높았으나 동학농민군은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주먹밥과 참으로 열악한 피복과 보급의 상황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수많은 농민군이 참혹하게 도륙되고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태인을 거쳐 금구,원평까지 후퇴하며,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한편 김개남의 부대도 청주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다시 전주로 후퇴하고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태인 방면으로 패주하다가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그를 체포한 전라감사는 지체하지 않고 김개남을 전주 초록바우에서 처형하고 그 수급은 한양과 전주에서 효수되었다.

금구,원평 방면으로 후퇴하였던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 피노리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김덕명, 최경선 등과 재기를 다짐하던 중 1894년 12월 30일 밤, 관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과 동지들은 처음에는 일본영사관에서 조사를 받다가 법무아문의 권설재판소에서 6차례에 걸친 심문과 공초 끝에 대전회통 법전의 국가변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고 1895년 4월 23일 전봉준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동지들과 함께 새벽 2시에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온 조선에 큰 들불로 타오른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그 막을 내렸다.

대포와 함께 사용된 일본군의 게틀링 기관포
대포,기관총 외에 가공할 연발 무라다총과 스나이더총

동학농민혁명군은 과연 왜 패했던가? 손자병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또한 하늘을 알고 땅을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고(知彼知己 白戰不殆, 知天知地 白戰穩勝), 큰 전쟁은 천시(天時), 인시(人時) 지시(地時)가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기로나 양적으로 동학농민군의 규모는 가히 압도적이었으나 전략과 질적으로는 적-일본군의 강함과 공주공략의 어려움에 대처하지 못함이 패인이었다. 제2차 봉기와 한양으로의 북상길에서 마주쳐야만 했던 일본군대의 동학농민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우수한 무기와 화력의 막강함과 함께 충청도의 수부 공주를 공격하고 점거하는 데에 있어서의 지시(地時) 즉 지형, 지세적인 험악성과 난제 앞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무너지고야 만 것이었다. 또한 마땅히 예상되던 강한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하여 철저한 공격을 준비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서울로의 진격과 북상의 시기를 필히 서두르고 앞당겼어야만 했다.

처음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전주에 입성할 때 까지는 대체로 천시(天時)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상황에서 마땅히 싸워야할 때 못 싸우면 결국 패배하고야 만다. 최시형이 마지못해 거사가 ‘시운’임을 말하긴 했지만 북접의 뒤늦은 합류가 때를 놓쳤다. 동학내부의 커다란 세력의 대종이던 법헌 최시형과 북접이 역사적 흐름과 긴박한 상황에 제대로 조응하지 못하고 적시에 움직이지 않은 인시(人時)의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는 동학의 최시형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던 북접의 지도인물들과 그들의 수하인 부안의 김낙철까지도 모두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필연성과 싸울 시기의 엄중함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깨닫지 못한 커다란 책임이 있다. 또한 전봉준과 함께 남접내부의 양대 지도자 역할을 하던 김개남의 행태 또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김개남의 종파주의 내지 개인주의 영웅주의와 폭력적 행태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성공을 위한 조건과 전제로 단합이 아닌 분열과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총사령관 전봉준의 허락이나 협의 없이 자의로 고종의 윤음을 가져온 칙사를 목을 베어버렸고, 전주성 점령 후에 호남좌도인 남원방면을 장악한 후 김개남은 너무도 과격하고 폭력적인 노선과 행태로 나아가서 많은 인심을 잃었다. 그는 일본의 침략 앞에서 전봉준이 제2차 기포로 삼례에서 북접의 손병희와 함께 연합전력으로 북상을 할 때에도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분파적인 행태로 임하여 커다란 실기와 전략의 차질을 빚고 말았다. 매우 뒤늦게 그는 남원을 떠나 청주를 공격하였지만 결국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고 그 과정과 시기 또한 전봉준과 긴밀한 협의 없는 자의적인 결정과 행보였다. 심지어 김개남이 남원을 뒤늦게 떠난 것은 남원에서 반드시 49일을 채워야한다는 황당한 도참설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도 들 정도였다. 전주성 점령 이후에 김개남은 참으로 엄중한 전쟁의 상황에서 온전한 기강도 단합도 보이지 않았다.

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처형 후 효수

전봉준과 동지들의 최후는 의연하였으며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형 직전에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백성 사랑하는 의로움, 나 허물 없었네/ 나라 위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
고부민란으로부터 조선천지를 격동시키면서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이렇게 처절하게 막을 내렸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혁명의 낙수와 부안이야기는 다음호에

 글 /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