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봐라, 뭔가 뜻이 있는것 같지 않니? 한쪽 모래가 다 떨어지면 끝나는게 꼭 우리 사는 것 같애.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끝이 있는 법이지."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2017년, 어김없이 그 끝자락에 당도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에 왔습니다. 글쓴이는 올해의 마무리를 <더 리더>로 맺습니다.

독일의 문학은 격정을 동반한 수많은 감정을 논하고 그것을 뒤흔드는 사건을 써내가도 차가움과 절제, 관망과 관조가 묻어나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국민에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고, 이후 독일어권 문학 최초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며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소개되는 등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주목하기 전부터 원작은 그렇게 인정받고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속이 뒤집어지는 듯 하다. 몸이 좋지 않아. 몇번의 구역질을 하고야 말았다. 투박한 손길로 치례없이 도와주는 여자의 모습에 마이클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부담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결국 석달 동안 침대에 묶여있어야 했지만 낫자마자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러 갔다>
그녀를 엿보고, 들켜버린 맘에 달아나버리고, 모든 감각이 그녀에게로 쏠려버려 다시 그녀를 찾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고. 마이클에게 그녀는 충동이자 본능적인 끌림이었습니다. 그녀에게 향하는 모든 감정을 사랑이라고 단정지었죠. 진실로 그 시절에는 그의 시간과 감정과 생각 모두가 그녀였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방어적입니다. 고작 이름을 물어보는 것에 바로 경계의 날을 세울 정도로 문맹이란 사실을 병적으로 감추고 싶어합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감성적인 한나이기에 더욱 더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맹의 치욕을 피하고자 그녀가 선택한 것은 외부와의 소통을 막고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쉼없이 느끼는 그녀지만 그 표현에는 자신의 무지함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요.

사랑하는 대상과 유일하게 표현해보일 수 있는 대상을 저울질 한다면 어떤 것이 우위일까요. 한나와 마이클에겐 저런 이유로 서로가 너무도 절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달아납니다. 수년의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법정에서 한나슈미츠란 이름을 듣습니다. 유태인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로 서 있는 한나.
한나의 문맹은 현 시대상을 읽지 못하는 무지함까지 불러왔습니다. 전쟁과 시대상을 모른 채 자신의 직분이 감시원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충실했기에 법정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자신의 그런 처지를 이해시키는 것에 힘들어하고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주도했다는 다른 피고들의 떠넘기기에도 더이상 반격할 힘을 잃었습니다.
마이클은 갈등합니다. 보고서의 주체가 아니고 필적감정 따위는 그녀에게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무기징역이란 절망 때문에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문맹이란 치부를 밝혀야 하는 것인지, 그에게 어떤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할 권리라는게 있는 것인가. 이번엔 마이클이 달아납니다.

소통과 비밀, 무지와 감정, 고백과 양심, 부정과 이해.
<더 리더>는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어떻게 지우고 가는지를 가해자와 방관자 모두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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