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면에 있는 김낙철이 지휘하던 동학농민혁명 부안집강소 전경

전형적인 농업국가였던 조선왕조에서 비옥한 곡창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성의 동학농민혁명군의 역사적 점령은 대단한 일이었다. 전주가 지금은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쇠락하였어도 동학혁명 당시에는 한수 이남의 최대의 도읍이었고 사대 종주국이던 옛 한나라 시조인 유방의 고향을 이른 풍패지(豊沛地)로서 이른바 태조 이성계와 이씨조선의 본향으로 삼는 도읍이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으로서는 필연적으로 다시 맞딱드려야만 했던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의 정규군-경군의 막강한 대포를 비롯한 우수한 무기와 화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전주에서의 공방전에서는 커다란 전력의 한계를 깨닫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초토사 홍계훈과 경군은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6월 1일에는 전주성 밖에 이르러 전주가 아래 바라보이는 완산주변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점거한 동학농민군과 서로 대치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6월 4일과 6월 6일의 두 차례에 걸친 양군의 접전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나와 선제공격하였는데, 그간 동학농민군이 전투에 상당한 효과를 보았던 장태의 공격도 평지가 아닌 산야전투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고 이번에는 대포를 비롯한 비교가 되지 않는 무기와 함께 전술상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관군이 동학농민측에 큰 피해를 준 전투로 이어져 동학농민혁명군으로서는 사기가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공작에 착수하면서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을 성내의 동학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용암 김낙철선생 내외분 사진 / 부안문화원 제공

전봉준 또한 동학농민군의 무기의 열세 및 전주성의 고립과 더불어 패전과 농사철로 인한 내부의 동요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김개남의 노선적 어려움이 심각하였다. 전봉준은 커다란 조선정국의 위기상황과 특히 일본군대가 서울에 입경하여 경복궁이 점거된 사태 앞에서 일본의 침략의 야욕과 현실을 직시하고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라는 전략을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봉준과 혁명지도부의 구체적인 고민들로서는 1. 일단 농민들은 모내기와 농사일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적인 시기의 고려 2. 무엇보다도 전주성 점령 직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엄연히 드러난, 관군이나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리기에는 무기와 화력의 열세가 뚜렷한 사실  3. 또한 동학 내부의 북접과의 관계나 단합이 아직 여의치 못하고 하나가 되지 못한 어려움들이 당면해 있었다. 때문에 마땅히 시간을 벌면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아울러 내부의 단합과 전투준비의 내실과 역량을 강화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들도 있었다.이에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두 차례에 걸쳐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동학농민군이 수차례 제시한 개혁요구들로써, 대체로 탐관오리의 숙청과 개항 이후 나타난 외국상인의 횡포와 국내 특권상인의 배격, 그리고 물가등귀의 원인이 되었던 미곡의 국외유출 방지 등을 주장한 것이었다. 전봉준은 이같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초토사 홍계훈도 함부로 결코 전주를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도인감사’라고 부를 정도로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정국과 호남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전봉준과의 타협과 협상을 통하여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학진이 제시하는 관민상화-상치의 방향과 결과를 전봉준이 합의함으로써 동학혁명의 매우 의미 깊은 과정과 결과물이었던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왕조 최초의 민중적 자치정치의 실현과 요즘 말로 하면 거버넌스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통치하던 감영의 선화당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총수 전봉준이 집강 거버넌스를 했다.

김학진은 전라도 관찰사가 집무하던 자신의 선화당을 전봉준에게 선선하게 내주며 협치를 당부했다. 그러나 사실상에 있어서는 전봉준과 동학지도부의 강력한 폐정개혁의 의지와 그들에 의한 집강소 통치였다. 전봉준은 호남 우도를 김개남은 호남좌도를 통치한 바, 그들은 금구 원평과 남원에 모두 대도소와 집강소를 두고 몇 개의 예외가 있었지만 전라도 53개 군현을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하였다.

전주성의 점거상태와 뒤이은 전주화약과 집강소 통치의 시기에서 제이차 삼례기포까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소강상태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봉준은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전주와 인접해 있는 순창,남원,태인,원평에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관군도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지 며칠 뒤 강화병 200명만 남겨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대부분은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전라도 일대에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무정부적인 마비상태에 있었다. 감사 김학진은 전봉준과 함께 치안의 복구와 관민의 화합에 대한 방책을 구체적으로 상의하였다. 동학교도의 협력이 없이는 지방행정의 질서와 수령의 위신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자치제도와 기관이었다. 이 집강소의 설치로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은 사실상 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집강소에는 분장을 나누어 집강 밑에 서기,성찰,집사,동몽 등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전봉준은 수천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 등지를 근거로 하여 전라우도를 관할하고,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전라좌도를 관할한바 특히 양반계급에게 극렬하게 대하였다. 관의 수령들은 눈치보기에 급급했고, 아전들과 서리들은 모두 동학에 입적을 해야만 저마다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집강소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건제의 개혁요구였던 폐정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숙청, 양반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개혁 정강보다도 더욱 혁신적인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개선도 요구하여 노비해방과 함께 모든 천민의 해방을 추진하였다.

옛 전라감영의 모습

부안에서도 집강소를 열었다. 일찍이 부안은 동학혁명 초기에 전봉준이 4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관아를 점령하며 부안군수 이철화를 처단하려 했으나 김낙철의 간청에 의하여 목숨만은 살려두기도 한 바 있었다. 부안읍의 대접주 김낙철이 부안 행안면 서도 송정리의 영월 신씨 제각에 대도소와 동생 김낙봉의 줄포의 두 곳에 집강소를 열고 부안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통치와 폐정개혁에 임했다. 김낙철의 노선자체가 원래 북접이었고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거나 과격한 것이 결코 아니어서 소위 ’요순시대로 돌아간 듯 했다’는 지나친 평이 있기는 해도 비교적 온건한 관민상화의 집강소 통치가 이루어졌다. 필자는 부안문화원의 자문과 도움으로 고 신석정 시인의 묘소가 가까이 있는 송정마을로 찾아가 1894년의 부안 집강소 옛터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초보적인 주변 관리도 소흘하고 아무런 역사적 해설도 안내표지도 찾아볼 수 없는 100년이 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과 부안민중사의 차원에서는 참으로 대단히 의미 깊은 부안의 집강소 건물은 비록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의연한 그 자태를 온전히 다행스럽게도 유지하고 있었다. 부안군과 전북도 차원에서의 백산성지와 함께 이같은 역사적 성지와 건물에 대한 성의있는 관리와 배려가 마땅히 있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왕가의 본향. 전주는 이성계의 4대선조 목조의 위패와 묘가 조경단으로 있다.

동학교도들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마을마다 포(包)를 설치하며 힘을 강화하고, 더욱 포교에 힘써 전라도에서는 청소년 대부분이 동학에 입교하여 접(接)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학농민혁명의 추세는 조선의 각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 강원도는 물론 경기와 멀리 황해도, 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청군에 이은 일본의 침략과 일본군대의 공격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과 역사에 일대 반제, 반봉건 민중민주주의의 원형인 집강소 통치와 거버넌스가 매우 값있는 역사의 진보와 개혁의 꽃을 지속적으로 피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 시절은 너무도 짧았고 비극적인 시기가 바야흐로 닥쳐오고 있었다.

 글 /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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