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연재 부안문화의 밥과 꽃
부안문화의 밥과 꽃24-위도사람들의 바다 지키기-3

종 8년(1682)에 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임치・고군산・산목포・다경포・법성포・검모포・군산포・신도의 8보를 위도에 소속시켰다. 위도관아에는 종 3품인 무관 첨사(僉使, 僉節制使의 약칭)가 있었다. 위도가 큰 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은 어획량이 많고 진장(鎭將)이 어세를 관리하도록 하여 진의 재정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만 해도 위도에는 수군진이 없었고 정부의 행정력도 미치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실시된 공도(空島) 정책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섬을 비워서 사람이 살지 않도록 한 조치이다. 이 정책은 고려 때 삼별초 난에 동조한 서남해의 해상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며, 왜구와 섬사람들의 연대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 하나는 강화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격포가 강화도의 ‘목구멍(咽喉)’으로 인식되면서 격포와 위도 · 검모포 등에 수군진을 설치하여 방어에 힘썼기 때문이다. 공도 조치는 조선에 들어와서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 되어 국가 정책으로 자리잡아갔다. 관의 허락 없이 섬에 몰래 들어간 자는 장 100대의 형으로 다스렸으며, 섬에 도피・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1683년에 첫 위도 첨사로 임명된 이송노(李松老)는 부임 직후에 관아를 지었다. 객사용으로 2칸 팔작지붕 건물을 짓고 이곳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이것은 진장과 수령으로서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위도에는 인구 증가가 따랐다. 섬에 들어가는 입도(入島)가 합법화되면서 육지에서 곤궁함을 면키 어려워진 사람들이 어염(魚鹽)의 이익을 좇아 섬으로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들이 소지한 족보를 통해서 처음 섬에 들어간 각 성씨별 입도조(入島祖)를 파악하면 대부분이 수군진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 섬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위도진에는 전선과 사후선 등의 배가 있었고 250 여명의 군사가 있었지만 이러한 법적 정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섬 지역에서 군사 활동이 계속되면서 사고가 속출했다.
 
전라도 위도진(蝟島鎭)의 군졸 1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으니, 휼전(恤典)을 거행하  도록 명하였다. -숙종39년(1713) 8월16일

이 때는 가을 전투 훈련으로 배를 띄우는 추범(秋帆) 시기로 보이고 수군진의 군졸은 위도의 일반 백성이 많았을 것이다. 위도 사람들은 험한 파도를 헤치며 고기 잡으랴 수군으로 복무하면서 바다 지키랴,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위도의 진리(鎭里)는 수군 진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에 면사무소와 우체국, 위도 중·고등학교가 있는 면소재지가 되었다. 현재 위도에 있는 관아는 섬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관아 건물이고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제 101호로 지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한때 관아는 위도면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관아를 중심으로 진장의 관사나 객사, 병졸들의 처소들이 들어섰을 것이지만 관아 주변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그 흔적조차 묻혀서 찾기가 어렵다.

(사)부안이야기 이사

정재철  ibuan@ibuan.com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재철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