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서 살았던 유형원과 전남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여러 가지로 비교된다. 공통점이라면 실학자(實學者)로 분류된다는 점과 저작을 남겨 지금도 연구가 되고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몇 차례에 걸쳐 유형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서울을 떠나 32세 때인 1653년(효종 4년)에 부안으로 낙향한다. 그가 정착한 보안면 우반동에 조상의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토지는 세종 때 우의정이었던 유형원의 8대조인 유관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다.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 라는 그의 심경을 담은 시를 읽어보자.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시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윗 시에서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라는 첫 구절에 주목한다. 그가 만난 ‘세상’은 어떠했을까. 15살에 겪은 병자호란은 그가 배운 기존의 유학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남한산성으로 피했던 인조는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춘다. 여기서 고두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이다. 이런 치욕스런 일을 당했음에도 책임을 져야할 정치 세력은 인조 주변에서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바른 정신을 가진 정권이라면 청나라에게 그런 치욕을 당함을 잊지 않고 통렬하게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과 책임을 지는 자세가 뒤따라야 했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 분노한 유형원은 청에 대한 복수를 당연시했다. 우반동에 와서는 하루 300 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를 키우고 양궁과 조총을 집안의 노복과 동리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41세 때는 서울에 올라가 외가인 정동에 머물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 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끝내 완성은 못했다.

그렇다면 유형원은 부안에 내려오면서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방략을 포기하고 은둔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은둔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계(磻溪)라는 호에서 이유를 찾는데, 반계는 그가 살던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서 따 왔다고 하나 부안김씨 고문서에는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 이름은 장천(長川)이었다.

반계는 오늘날 중국 섬서성 보계시 동남에 있는 강물이다. 이곳은 강태공이라 부르는 태공망 여상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기 전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다.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은 늦게나마 문왕을 만나 주나라를 세우는 천하대업에 일조 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피난을 다니면서 유형원은 청에게 고국이 짓밟히는 참혹함과 유리방황하는 백성들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강태공이 문왕을 도와 나라를 세웠듯 나라를 다시 세울 정도의 혁명이 필요함을 공감했을 것이다. 유형원은 이곳 우반동에서 나라를 개혁할 공부를 밤낮을 잊고 전투하듯 하면서 꿈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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