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임명장

수운 최제우가 동학혁명의 사상적 씨를 뿌리며 1864년 대구에서 순도하였다. 그가 죽은 후 30년간을 해월 최시형이 모진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지하활동과 포교의 실천활동을 전개한 끝에 동학은 사상적으로나 세력적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 속에서 거대한 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동학은 정부와 관헌의 탄압 속에서도 대궐 앞 상소와 교조신원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찍이 최제우가 씨를 뿌리고 최시형이 장기간 불굴의 포교활동을 통하여 그 씨를 민중 속에 확대한 동학의 조직과 힘은 마침내 녹두장군 전봉준에 의하여 1894년에 전라도 고부 땅에서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로 터져 나오게 된 것이었다. 들녘에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태우듯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른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조선왕조가 민중을 오직 수탈과 탐학의 대상으로 삼은 구조적인 불의와 모순의 체제와 토대 위에서 필연적으로 터져 나온 활화산이었다.

1894년 갑오년에 탐학의 고부군수 조병갑에 맞서며 일어선 고부의 소요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전개되는 데에 있어서 단순한 소요와 민란의 수준을 뛰어넘어 근본적으로 봉건적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개혁하는 혁명적 대사건과 운동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뿌리 깊은 봉건적 조선왕조의 부패와 탐학적 정치였고 사회경제적 모순구조였다. 이러한 구조와 상황 속에서 민중이 그들을 지배하는 왕조와 정부에 대항할만한 일정한 조건과 힘이 성숙한 때문에 거대한 항쟁은 가능할 수 있었다. 그 일차적으로 성숙한 조건은 최제우가 씨를 뿌리고 최시형이 그 씨를 민중 속에 확대한 동학이라는 사상과 조직과 집단이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민중적 항쟁이 동학이라는 종교적 세력과 결합되어 처음에는 핍박받던 전라도 농민들에 이어서 전국적인 민중들의 거대한 에너지와 실천적 싸움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체포당한 최시형

동학은 1894년의 갑오농민혁명 직전에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드디어 막강해진 그들의 조직과 힘을 이른바 수운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하여 결집시키고 과시할 수 있었다.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된 교조인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죄를 정부가 풀어주고 이어 동학에 대한 탄압을 풀어 달라고 하는 교조신원운동은 1892년과 1893년에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의 2대교주인 최시형은 그가 1871년의 경북 영해에서 발발하였던 이필제의 교조신원운동과 난의 경험을 통하여 정부에 맞서는 항쟁이나 투쟁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의 삼남 땅에 확대된 동학의 힘과 조직은 교주 최시형의 이 같은 소극적인 의식과 행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하여 1892년 10월의 공주와 11월의 삼례의 적극적인 교조신원에 대한 요구와 민중적인 투쟁이 드디어 대대적인 1893년 12월의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루어진 집회와 대궐 앞 복합상소로 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삼례집회에서 두 번에 걸친 교조신원의 요구에서 전봉준 등 호남의 교도들은 ① 동학당을 사도(邪道)로 정하지 말 것 ②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낼 것 ③ 탐학하는 지방관리를 제거할 것 등 3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등의 내용을 통하여 기왕의 교조신원의 종교운동보다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반봉건ㆍ반외세의 정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1892년 10월 공주 집회에서 시작되어 1893년 4월 삼남 집회의 해산까지 진행된 교조신원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동학교단의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라는 종교적 요구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지만, 삼례 집회와 괘서 투쟁, 삼남 집회 등을 거치며 반봉건,반외세의 투쟁 의지를 결집시키는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학종교의 교단적인 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는 교주 최시형과 온건한 북접의 교단 지도부와 구분되는 전봉준, 서인주, 손화중 등 남접의 강경파가 동학내부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을 예비했던 사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고부에서 조병갑의 만석보와 탐학질에 맞선 소요는 그 지도자로 싸운 전봉준에 의하여 일반적인 민중적 소요나 민란의 수준이 아닌 거대한 본질적인 항쟁과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전봉준은 오랫동안 작은 서당에서 아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살다가 동학의 접장으로 있었다. 그의 부친 전창혁이 조병갑에 맞서서 장두로 장살형을 당하고 죽은 개인적 아픔과 원한도 전봉준에게 있었지만 전봉준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을 넘어서서 농민들과 민중들의 비원과 꿈을 근본적으로 낡은 봉건적 모순을 혁파하려는 의지와 항쟁으로 발전시켰다. 이같은 의지는 이미 고부민란 항쟁의 초기에 ‘사발통문’을 통하여 피력되었으며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의 깃발과 강령적 차원의 선언인 백산봉기와 창의문으로 이어진다.

사발통문

동학농민혁명에 있어서 ‘사발통문’에서 ‘백산봉기’에 이르는 이 시기와 부분은 매우 중요한 발단이 되는 바,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고 건의 하였으나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봉준은 동학접주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들에게 보내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봉기를 맹약하며 일개 일시적인 소요와 민란의 차원이 아닌 봉건적 조선왕조의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모순의 혁파와 과감한 혁명의 의지를 천명하였던 것이다. 물론 아직 동학혁명의 초기단계에서는 이같은 혁명과 항쟁 의지에 대해서 찬동을 하지 않는 무리와 지도자들도 적지 않았다. 갑오년 동학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과격한 행태를 보인 본명이 김기범인 대접주 김개남 마저도 전봉준의 혁명적 거사에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전봉준은 그의 젊은 날부터 남다른 혁명적 거사와 뜻을 지니고 동학 내부의 유력한 지도자이자 대접주인 손화중과도 교분을 갖으면서 준비를 나름대로 하여오던 인물이었다. 전봉준은 막상 부안일대의 대접주인 김락철이 교주 최시형과 김연국의 북접계열과 로선으로 과감한 혁명과 항쟁의 입장이 아닌 것을 숙지하고 4월 말 무장의 대접주인 손화중을 찾아가서 혁명과 거사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고 마침내 그 찬성과 동의를 얻기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로 수천의 무장의 동학농민세력을 규합하여 드디어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에서 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백산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반봉건 반제 척외양창의 항쟁을 위한 백산봉기의 창의문을 천하에 선포 고지하였다.

한국에서 제작한 영화 '동학란' 포스터
북한에서 동학 10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본격적인 동학교도와 혁명적 농민세력과의 역사적 결합은 이때부터 차원을 달리하여 비롯되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은 전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추게 된 후 전봉준이 최고지도자인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 김개남이 총관령으로, 비서에 최경선 등을 임명하며 항쟁의 지도부의 조직을 구성, 완료하였던 것이다. 원래 전봉준은 동학의 접장으로서는 동학의 인물들 중에서는 비교적 낮은 서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오래전부터 혁명을 꿈꾸고 준비하여온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영걸적 인물과 위인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 장군과 그를 중심한 남접의 실천과 영도력 없이는 동학의 최고 교주 최시형이나 그 어떤 지도자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일대 혁명적 사건이었다.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인 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③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하여 백성과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무장에 이은 백산에서의 봉기를 통하여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바야흐로 단순한 지역적인 민란의 성격을 지양하고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외세와 봉건적 집권층에 대한 본격적인 항쟁이며 혁명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글 /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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