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연재 부안민중사
부안민중사8-우반동의 혁명과 개혁의 꿈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기록화

 

우리는 앞서서 부안의 우반동의 유토피아와 개혁의 꿈을 허균과 유형원의 삶과 사상의 궤적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우반동은 이 두 인물, 만민평등의 이상적인 국가 율도국을 꿈꾼 허균과 봉건국가의 개혁을 시도했던 유형원의 꿈과 사상이 머무른 곳일 뿐 아니라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어서 연암 박지원(1737-1805)이 그의 소설 허생전을 통해서도 부안의 변산반도를 이상사회로 그렸던 곳이기도 하다.

18세기의 비범한 문학가인 박지원은 그의 <열하일기>의 ‘옥합야화’편에 있는 <허생전>을 소설로 썼다. 그 내용은 가난했던 양반 허생이 10년 공부를 작심하였으나 생활이 곤란하여 7년 만에 관두고 나서 부자에게서 10만 냥의 큰돈을 빌어서 장사를 벌리고 안성을 거점으로 해서 상품을 크게 매점매석을 해서 거액의 돈을 벌게 된다. 그는 장사로 막대한 이윤으로 돈을 벌은 후에 변산반도에서 일어난 농민폭동 참가자 2000명을 데리고 무인도에 가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박지원이 구상한 이상사회는 순전히 허구와 공상에 불과하였으나 이 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과 같이 신분적 차별과 봉건적 억압에 신음하던 민중과 농민들의 소박하고 간절한 비원과 꿈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박지원이 그의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과 무대가 변산반도에서 일어난 농민폭동 참가자들을 규합하여 만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반동과 우반동이 속한 변산반도는 걸출한 봉건적 조선왕조시대에 그 타부를 깨고 혁명과 개혁과 공동체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허균과 유형원과 박지원의 공동의 꿈과 유토피아의 터전이 되어 있는 점이다.

허균은 유형원보다 35년 전에 우반동에 와서 <홍길동전>과 많은 저술을 남기면서 그의 혁명적인 봉건신분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다. 유형원은 비록 너무 지나친 숭명배청 의식에 사로잡히고 주자학적인 상고주의적 의식의 한계가 있었으나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에 앞서서 국가의 총체적인 개혁의 구상과 정책들을 방대한 <반계수록>으로 가다듬었다. 이는 유형원을 따르는 후학들과 학자군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적 구상과 정책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그의 사후 100년 만에 영조의 특명에 의하여 편찬이 되고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어도 국가적인 개혁안으로 실천되지는 못하였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목표는 반봉건 반외세 항쟁인제폭구민, 광제창생, 척왜양창의였다.

영조나 정조라는 세종을 이은 조선왕조에서의 선한 군주들이 나와서 탕평책을 쓰고 특히 정조에 이르러서는 그가 총애했던 정약용의 등용을 비롯하여 각별히 국가의 제반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듯 하였으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더불어 황금시대는 사라지고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세도정치의 전횡과 탐학과 부패로 말미암아 무너져가고야 말았다. 평안도의 홍경래란을 비롯한 각종 민란들이 발발하고 국운은 쇠퇴하며 더불어 열강의 침략 앞에서 나라가 꺼져가는 등불의 운명으로 치달렸다.

이 같은 구한말의 암울한 정세 속에서 일찍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원래 경주 사람이지만, 그가 박해를 피해서 전라도의 남원 교룡산성으로 옮겨와서 그 곳에서 수도를 하면서 저술을 하고 칼춤을 추면서 새로운 인내천과 개벽의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결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그가 순교하면서 뿌린 새로운 세상을 위한 동학이라는 진리는 해월 최시형의 ‘최보따리’라는 이름의 불굴의 포교의 실천 속에서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결국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활화산으로 분출이 가능한 사상적 조직적 기반을 이루었다.

조선왕조가 망하기 전에 역사적으로 마지막 민족을 위한 구원과 희망의 불길과 활화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이다. 1894년 썩을 대로 썩은 봉건조선왕조의 민중들에 대한 탐학 속에서 거대한 혁명의 불길이 고부에서 일었다. 이 혁명의 거대한 화산과 불길은 조선반도를 온전히 동요케 하고 전국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꽃으로 들불처럼 퍼져갔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왜양창의 목표와 깃발을 들은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약 일 년여의 처절한 투쟁 후에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의 동학농민혁명의 그 의미는 참으로 깊고 심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

일본의 명치유신은 1868년에 이루어지고 그들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불완전하나마 근대화와 산업화 군국주의를 이루며 협소한 그들의 국내시장 문제를 타개하고자 일찍부터 해외식민지와 침략을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다. 일본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시기를 악용하여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조선침략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노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야욕과 본색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만약에 우리의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지 않고 온전히, 아니면 부분적으로라도 성공하였더라면 우리의 근대적 개혁과 더불어 식민지의 운명이 아닌 주체적인 역사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식민지 노예에 이은 분단과 전쟁의 쓰라린 역사가 아닌 새 날이 가능하였을 터인데 참으로 통한스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농민들에 습격된 조병갑이 군수이던 옛 고부 관아의 모습이 192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보도 (朝鮮古蹟報道)』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과거에는 동학농민혁명은 철저히 지배계급의 시각에서 그리고 구태와 낡은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던 고루한 사학자들과 일제에 의하여 오랫동안 동학란으로 폄하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엄연히 동학농민혁명으로 그 의미와 바른 이름값의 정명(正名)이 이루어졌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1894 갑오농민전쟁으로 지칭된다. 여기에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한 독일농민전쟁의 시각과 이념적인 연속선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여하간에 남북의 이념과 체제적인 차이를 넘어서 우리 역사에서의 동학농민혁명의 위대성과 그 의미는 크고 심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하였더라면...? 만약에 무능한 고종의 조선정부와 민씨 척신일족의 봉건통치배들이 청국과 결과적으로 외세를 동학농민혁명의 와중에서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라는 몇 가지의 질문과 가정을 해본다면, 참으로 망국으로 치달려가던 우리 한반도의 운명이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와 노예로 전락하는 그 참담한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동학농민혁명 내부에 많은 문제점은 있었을지라도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상당한 성공을 이루거나 적어도 전라도에서 통치지배계급과 동학농민혁명세력과의 타협적으로 이루어진 전라도 53개 군현에 모두 설치되었던 폐정개혁을 위한 집강소의 설치와 이에 따른 과감한 개혁조치들이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이루어졌더라면 우리의 식민지의 노예의 역사가 아닌 상당한 정도의 근대화와 개혁을 수반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참으로 크게 진보하고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깊은 탄식과 회한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라도는 원래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를 통해서도 그리고 조선왕조에서도 선조시대에 정여립의 대동계와 기축옥사를 통해서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서 많은 차별과 역압을 받은 곳이었다.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농업국가의 근간을 담당하는 전라도의 기름진 곡창지대였지만 필연적으로 가장 극심한 탄압과 수탈과 억압을 당한 곳이 전라도였고 전라도 민중들이었다. 이런 전라도에서 폭정에 대한 항쟁과 혁명의 불길이 솟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도 이름 높은 풍요한 땅이 고부군이었다. 오늘날, 예전의 큰 고을이던 고부군은 일부가 부안군과 정읍군에 행정적으로 분할 편입되어 사라져버리고 초라한 고부면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름만큼이나 고부는 많은 조선의 관리들이 저들의 탐학질을 위해 눈독을 들이는 전형적인 땅과 고을이었다. 이조 말 고종 때에는 대규모의 민란이 26회나 발생하였는데 특히 1892년 5월에 고부에 군수 조병갑이 부임하자마자 만석보를 만들어 수세, 황지과세, 불효세 죄명, 대동미, 건비 등의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고 착복과 토색질이 너무도 심하였던 상황에서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병갑은 당시에 세도를 떨치던 풍양조씨 집안의 권속으로 그의 아비 조규순도 태인 현감을 지낸 터였고 그의 백부가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이고 충청감사를 지낸 조병식도 사촌간이었다. 조병갑은 이런 배경을 믿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가렴주구와 토색질을 자행한 것이었다. 이에 항의하던 부친 전창혁이 장살로 사망한 후에 동학의 접장이자 훈장이었던 전봉준이 분노한 농민들을 지도하여 1893년 12월과 그 이듬해 갑오년인 1894년 1월에 2회에 걸쳐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오히려 축출되고 체포당함에 이르러 2월 15일에 관아를 습격하여 세미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의 저수지를 파괴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정당하게 봉기한 농민들을 동학도로 취급하며 탄압하자 농민들은 4월 하순에 인내천,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부르짖으며 부안의 백산에 집결하여 천하에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창의문을 발표하며 농민 수천 명의 호응을 얻으며 봉기하게 되었다.

1895.3월 처형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1954년에 세운 천안전씨 문중의 허묘. 비석에는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이 새겨있다.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 일 년 간 전 조선천지에서 수백만의 민중이 떨쳐 일어나 궐기하며 싸우고 결과적으로 무려 3-4십만의 민중의 희생자를 내면서 그 지도자이던 전봉준이 11월에 순창에서 체포되고 그 이듬해 3월에 전봉준과 지도자들이 처형됨으로써 비극적으로 끝을 맺었다. 무능하고 부패했던 고종과 민씨 척족 봉건통치세력은 무서운 기세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제압하거나 맞설 형세가 되지 않았을 때에 비굴하게도 청나라의 병력을 청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과적으로 조선침략의 야욕으로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군대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동학농민혁명군을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히 도륙하면서 그와 함께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의 운명으로 전락되었다.
다음 호에서는 위대했던 동학농민혁명의 큰 흐름의 과정, 의미, 족적과 함께 부안민중사의 시각에서 동학농민혁명의 큰 국면의 문제와 더불어 부안의 관계를 다음 부분들에서 살펴보려 한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자웅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