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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문화의 밥과 꽃22-위도 정금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니 -1
   
 

도 진리 앞에는 정금도라는 섬이 있다. 이곳 초가집에서 저녁밥을 지을 무렵 뿌연 연기가 연한 바람에 날리며 동네 곳곳을 안개처럼 덮는다. 이것이 위도 팔경 가운데 하나인 정금취연(井金炊煙)이다.
  정금은 섬이다 보니 물이 빠지지 않는 한 바다 물속에 갇히면서 왕래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정금다리가 놓여서 언제라도 건널 수 있지만 50년대만 해도 사리 때는 정금을 갈 수 있었지만 조금 때는 물이 덜 빠지기 때문에 건너기 어려웠다. 이곳에 다리의 필요가 절실해지면서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어 날라 오면 남자들이 시멘트를 부어서 만든 얕은 다리가 있었다. 그러나 물이 차면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정금다리와 관련해서는 조선 숙종 때의 역관(譯官)인 장찬(張燦)이란 인물이 거론된다. 청어로 돈을 많이 번 장찬이 엽전으로 정금다리를 놓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나돈다.
  장찬은 위도 정금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형 장현과 함께 역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신이 청나라에 갈 때면 역관들이 함께 가기 마련이다. 이 역관들이 물건들을 가져다가 팔면서 많은 이득을 남겼는데 장찬도 수완이 좋아 많은 재물을  모았다. 정부에서 금한 물건을 가져간 일로 사헌부에서 장현과 장찬에게 죄주기를 청하기도 했다.(효종4년, 1653) 역관들이 연경에 갔을 때는 긴요한 문서를 찾아왔고 장찬 또한 환송한 방물(方物)을 자력으로 실어 온 것 등으로 상도 받고 관직이 오르기도 했다.(현종 13년,1672년)
  장찬은 자신의 재력으로 큰 길 옆에다가 거창한 누각을 지었다가 문제가 되어 누각이 헐리기도 했다. 장찬이 결정적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유배가 된 것은 조카 장희재(張希載, 장희빈의 오빠)와의 관계 때문이다.

"장현(張炫)·장찬(張燦)은 장희재(張希載)와 가까운 친족으로서 타고난 성질이 매우 흉악하고 교활하여 재물은 온 집안에서 으뜸이요, 자질(子姪)들은 모두 수재(守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옥이나 의복의 장식은 사치하여 법도를 넘어서고 경상(卿相)과 서로 결탁하여 동류처럼 보며 크고 작은 조정의 논의에 반드시 끼어들어 모의를 하고 장희재를 지도하여 흉모(凶謀)를 이룩하도록 도왔습니다.           -숙종 20년, 1694-  

장희재는 동생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독점하자 금군별장(禁軍別將)에서 총융사(摠戎使)로 승진했고 인현왕후가 복위한 뒤로는 이를 투기한 장희빈과 함께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장희재의 친족인 장찬도 장희빈의 일에 관여된 혐의로 남해현으로 귀양갔다가 백령도를 거쳐 위도의 정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장찬이 백령에서 위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는 6개월이 넘도록 위도를 가지 않아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기도 한다. 그는 정금도의 어려운 유배기간 동안에도 청어사업에 손을 댄 모양이다. 사업 수완이 좋아 돈을 벌어 부안고을의 굶주린 백성을 먹이라고 쌀 수천 석을 거부했다는 증언도 있다.(『부안이야기』 13호, 2015, 54쪽)
  서해훼리호 위령탑에서 나무 사이로 정금마을을 보면 그림 같다. 지금은 이 마을에서 정금취연을 보기는 어렵지만 장찬의 후손 인동(仁同)장씨(張氏)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고 선산도 이곳에 남아 있다.

정재철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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