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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민중사⑥- 우반동의 개혁을 위한 유형원의 꿈과 그 한계
논가에 버려진 반계가 군사훈련을 할 때 썼다는 돌기둥

부안 우반동에서 지은 유형원의 노작 <반계수록>은 약 100년을 빛을 보지 못하고 반계 집안의 책 상자 속에 묻혀 있다가 영조시대에 비로소 대구감영에서 국왕의 특명으로 출판이 된다. 그러나 그가 저술 속에서 원했던 국가개혁의 실천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원에서 성호 이익으로, 그리고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 속에서 반계의 국가개혁을 위한 총체적 실사구시적인 정책이나 사상은 폭넓게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갔다.

원래 유형원은 당시에 심각했던 당쟁의 계보에서 북인계열에 속하였으나 그의 부친 유흠의 옥사로 가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후에 유형원의 가문은 남인에 편입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래 17세기 중후반의 근기(近畿)남인계열은 서경덕과 조식 등 북인들로부터 학풍에 있어서 학문적 다양성 및 개방성, 사회경제 개혁에 대한 관심 등의 차원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허균의 부친 허엽이 동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경덕의 문인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허균이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과 교분이 있었다는 것도 이런 관계성 속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점들이다. 그 성격과 결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허균의 박학다식한 학문적 자질과 유형원의 박학적 행태 또한 이러한 연속선과 동질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허균은 북인의 핵심이었으며 또한 유형원의 고모부이던 김세렴의 조부인 동서붕당의 장본인이던 김효원이 바로 허균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학문을 가르친 고모부 김세렴이나 이모부 이원진 등도 대표적인 당대의 박학의 학문을 지향한 인물들이었다. 이른바 경화사족 내지 근기 남인들의 학풍의 흐름은 다산 정약용에까지 이르게 된다.

용인의 유형원의 묘소, 그는 부안에서 사후에 선영이 있는 용인의 부친의 묘소 아래 자신의 묘를 쓸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허균이 그의 젊은 날에 겪은 7년간의 임진왜란의 비극과 참상을 뼈저리게 새기면서 국가와 세상의 혁명사상을 지닌 것과 같이, 유형원은 그가 15세에 겪은 병자호란의 참극과 삼전도의 모멸 속에서 그의 개혁의 사상과 의지를 일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원은 새로운 세상의 개혁을 꿈꾼 진정한 사상가와 개혁가의 차원에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아쉬운 한계를 지닌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이 그의 시대적 한계를 앞지르고 뛰어넘은 혁명적 사상과 실천적 삶으로 인해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형원은 비록 개혁의 꿈은 지녔을지라도 너무도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주체적 입장과는 거리가 먼 중국에 대한 특히 멸망한 명제국에 대한 도저한 숭모적인 사대의식이나 신분제 등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모순을 혁파하는 입장과는 거리가 먼 상고주의 내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한양에 살던 유형원이 굳이 부안 우반동으로 온 것은 과연 어떤 이유들이었을까?
분명히 그것은 두 가지 동인과 이유로 파악된다. 유형원이 1653년에 부안 우반동에 은거하게 된 것은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이상 그가 관직에 나갈 희망과 뜻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은 2살 때에 부친을 잃은 손자를 아들처럼 키우고 보살핀 그 자신 정랑을 지낸 인물이었는바, 그는 간절하게 유형원의 과거급제를 소망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고 검열의 직위까지 지낸 아들 유흠의 참극으로 인해서 유형원의 앞길이 조부의 간절한 과거의 급제와 출세가 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막혀버린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유형원의 부안 우반동 이거의 원인의 하나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서 매우 큰 사건이었던 명나라 제국의 멸망에 따른 극심한 상실감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가 숭앙하던 명 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가 너무도 혐오하던 오랑케족인 청나라의 중국지배라는 현실을 매우 굴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형원은 뿌리 깊고 전형적인 숭명배청(崇明拜靑) 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반동에서 <중흥위략>이라는 저술에서 중국과 조선의 문명재흥의 의지를 보이며, 우반동의 200여 지역민들을 군사훈련으로 단련시켰다. 또한 혹시 도래할 수 있는 그가 ‘누린내 나는 오랑케’로 부른 청나라 전복의 기회에 대비하고 명나라를 부흥시키는 꿈을 안고서 중국에까지 이르는 해로를 미리 상세히 파악해 두고 4,5척의 큰 배를 준비하고 하루에 300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중국어를 스스로 공부하고 또한 타인들에게도 이를 권유하며 심지어 그가 개혁의 안으로 내놓은 교육제도 속에 중국어를 배워야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주도에 표류한 명나라 유민들을 갖은 노력을 다해서 직접 만나고 중국어로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제일 먼저 묻기를 명나라 황제의 안위와 더불어 그 황제가 아직도 중국의 몇 개의 성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가에 지극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반계의 시문집 -반계일고가 발견되어 그의 문학적

감성과 전 인간적 풍모를 더 감지하게 되었다.

유형원은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로 뿌리 깊은 명제국과 황제에 대한 의리와 함께 그들 중심의 문명회복에 대한 과제를 생의 중요한 목표의 하나로 설정한 인물이었다. 유형원이 우리나라를 지칭한 ‘동국(東國)’의 역사 서술에 대한 것도 그가 결코 민족주의적인 입장이나 관점이 아니라 이 같은 숭명배청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문명회복과 문명국에 어울리는 동국의 역사서술의 의도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에 오랑케로 부른 청의 황제 앞에서 소위 문명국 명나라와 조선의 임금이 치욕적으로 항복하는 굴욕적이며 전도(轉倒)적 상황 속에서 조선의 전통적 사대부들과 지식인들이 혼란과 분노에 빠진 상황을 어느 만큼은 이해한다 해도 유형원의 경우는 도를 넘는 배명의식과 행태였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이다. 이에 반하여 유형원에 한 세대 이상 앞선 허균의 경우에는 일찍이 동아시아 정세, 특히 명이 멸망하고 여진족 출신의 청이 흥기할 것을 정확하게 이미 예견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허균은 또한 주자학에도 정통하였지만 그것의 한계 또한 잘 알고 있었고 유형원의 배명의식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형원의 경우에는 병자호란 이후에 무너져 버린 성리학적 질서 회복에 집착하고 특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복고적인 인물이었다.

영조실록에 실린 반계수록 편찬에 관한 내용

아쉽게도 유형원은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과 행태를 보인다. 그리하여 유형원은 자신이 편찬할 동국-우리나라의 역사서는 일체 옛날 주희의 각 왕조를 ‘정통’과 ‘비정통’으로 구분하고 소위 의리에 대한 포폄을 가하여 각 사안을 서술하는 <자치통감강목>의 체계와 기준을 따를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역사서술의 대전제와 기준을 명시하였다. 그는 철저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옛 춘추시대의 천왕과 제후 관계에 대입하여, 황제국인 중국을 섬기는 제후국으로서의 동국을 인식하였다. 때문에 유형원은 동국의 역대왕조마다 그들이 중국에 예속되었는지 여부를 반드시 써서 분명히 밝히고, 동국이 황제국의 책명을 받은 일들과 중국 황제의 사망 및 즉위와 같은 대사를 역시 빠짐없이 기록하고자 했다.

유형원의 주장으로도 그가 살던 당시의 국민의 무려 3분지 2가 노비들이었다. 소수의 양반 사대부들이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독점하며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수의 백성들인 노비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 조선의 구조적 모순과 현실이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왕조 500년 내내 그들의 보수, 녹봉을 지급하는 관료들의 숫자가 4000명을 넘지 않았다 한다. 이들 중에서도 각종 무관들을 제외한 정규 행정관료들의 수는 1000명을 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특히 출세를 위한 무관들의 응시가 엄청나게 많아지기는 하였지만 엄격한 신분제를 기반으로 삼은 조선왕조에 있어서의 통치집단에 속하는 과거제에 의한 관료가 되는 진입장벽은 실제에 있어 매우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구조였다. 허균과 같은 이는 <유재론>을 통해서 능력과 자질있는 인물들의 등용과 서얼의 차별과 철폐를 혁명적으로 주장했고 유형원의 경우는 허균에 비해서는 기존 과거의 철폐를 ‘천거론’으로 대체하였지만 그것은 양반 사대부계급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보다 더 온건하고 보수적인 개혁로선이었다.

그를 사모했던 홍계희의 반계의 묘지 비석의 생애의 행적과 찬

유형원은 허균이 본질적으로 뛰어넘고자 했던 봉건유교사상에 기초한 이른바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봉건국가의 국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을 일정하게 개혁, 조절하는 입장에서 대토지소유제를 비판하고 봉건적 국유제의 원칙에서 특권 상층 관료배들에게 더욱 많은 토지를 줄 것을 전제로 농민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다시 나누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노비에 대한 학대와 수공업자에 대한 천시가 심각함을 지적하고 문벌, 서얼의 차별, 출신지역의 차별을 반대하고 양반지배계급내부에서도 바르게 인재를 등용할 것과 환자, 군포제도에 있어서 봉건정부의 가혹한 착취제도를 합리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라와 민중의 삶을 외면하고 당파싸움에 골몰하던 당시로서는 유형원의 사회개혁안은 부분적으로 진보적 측면은 있으나, 아쉽게도 이 모든 것들은 가난하고 천대받던 민중들의 삶과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기 보다는 봉건국가와 양반들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였다.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원에서 있은 반계사상 세미나에서 전북의 ‘호남실학원’과 전남 광주의 ‘한국학호남진흥원’ 설립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전북 부안의 반계 유형원과 전남 강진의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내용으로 한 실학연구단체 기관의 설립에 관한 논의들인데, 막상 전북의 논의와 추진이 지지부진인데 반하여 전남 쪽에서는 이미 문화체육부에 설립신고도 해놓고 금년에 시작을 한다는 소식이다. 최근 모든 정부 사이드의 지원과 힘의 균형이 전북에 비해서 전남에 많이 기울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또한 다산 실학연구 방면에서는 단연 오랫동안 두각을 나타내온 전남의 박석무 전의원의 리더쉽과 로비력에도 이런 현실적인 추진력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조금 씁쓸하게 들었다. 그러나 선의의 윈윈의 상생적인 균형과 융합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특히 전남과 강진에는 빠져있는 일찍이 ‘천하공물’을 주장했던 정여립에 이은, 전북 부안의 허균의 ‘만민평등’의 강력한 혁명적 유토피아의 꿈과 유형원의 개혁의 의지를 같이 크게 묶어 추진하는 ‘우반동의 새 세상을 위한 비젼’과 실천이 부안과 전라도 민중 나아가 우리 통일한국 전체의 미래적 비원으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본다.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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