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배진 /변산면

누가 보면 예비군 훈련이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이건 다름 아닌 내 결혼식 사진이다.

30년 전 나와 아내, 그리고 형님 부부는 합동결혼식을 치렀다. 형제간의 합동결혼식이라고 해서 물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결혼생활 10년에 애도 둘이나 낳았건만 식을 올리지 못했던 형님네 부부. 그리고 나도 마침 아내와 살붙이고 살기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이어서 그 참에 함께 거사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예비군복을 입은 이유를 설명하자면 구구절절하다.

살림이 넉넉치 못했던 우리는 결혼식 준비를 위해 쌀 두가마를 꿔서 판 돈 2만2천원을 가지고 시장엘 갔다. 가장 먼저 산 것은 아내를 위한 요강이었다. 그 다음으로 예비군복을 샀다. 예비군 훈련을 가면 복장점검을 받아야 하기에 필요했고, 일할 때 입을 수도 있어 일석이조가 따로 없었다.

마땅히 다른 옷이 없었던 우리는 결혼식에 이 옷을 입었다. 바지 길이가 짧아 검정 양말을 신은 발목이 나오고, 거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모양새가 어찌나 우습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군사독재 시절의 흔적인 듯해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나 그때는 흔한 일이었다.

결혼식 예물을 준비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금가락지를 할 형편이 안됐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생각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요강과 옷을 사고 남은 돈으로 곡괭이와 삽 한 자루, 호미 두 자루를 샀다. 그래서 예물교환을 하는 시간 주례 선생님은 형님에겐 삽을, 나에겐 곡괭이를, 형수님과 아내에겐 호미 한 자루씩을 건네주었다. 농사일을 천직으로 알고 이곳에 뼈를 묻으리라고 다짐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도청리 금구원 농장에서 단출하게 치르려 했던 결혼식은 친구들이 만국기를 내걸고, 주례를 맡아주신 금구원 농장의 김병렬 선생님은 화환을 챙겨줘 근사한 야외결혼식 무대가 되었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 중 단 네 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이 자리에 와 음식을 나눠먹으니 결혼식은 아예 왁자지껄한 동네잔치가 되어버렸다.

가진 것이라곤 뚝심 하나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의 나는 그렇게, 결혼생활과 농사꾼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다. 그때 불끈 움켜쥐었던 곡괭이의 온기는 아직도 내 손아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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