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만경사람 진표(眞表)는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을 찾아 들었다. 미륵상을 모시고 3년 동안 법을 구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자, 절망한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진다. 몸을 돌보지 않고 죄과를 참회하는 구도 방법인 망신참법(亡身讖法)이다. 그때 어디선가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그를 받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762년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교법(敎法)을 전해 받고 산에서 내려왔다.
  진표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했다. 어느 해 사냥을 갔다가 쉬면서, 집에 가지고 가서 구워먹을 생각으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코와 입을 꿰어 물에 담가놓았다. 그러나 사슴을 쫓다가 다른 길로 돌아오는 바람에 개구리 잡아놓은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다음해 봄에 우연히 다시 그곳을 지나던 그는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개구리들을 보았다. 깊은 자책에 싸인 그는 개구리들을 풀어주고 출가(出家)한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宋高僧傳에서)
  출가동기를 전하는 위의 내용 중 개구리는 신라에 패망한 백제유민들의 어려운 삶을 상징하고 있다. 진표는 이들 백제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할 목적으로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진표는 백제지역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제도하여 미륵이 하생(下生)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불교의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얘기하는 진표와 이를 열렬히 지지한 지역 주민들에게는 신라에 망한 뒤 100년이 지났어도 백제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것은 백제전통의 계승과 부흥으로 이어져 숨을 고르다가 후백제로 나타난다.
  하서의 백련동을 거쳐 문수동을 지나 오르면 의상봉에 닿는다. 의상봉 동쪽 절벽에 부사의방이 있다. 3~4평 정도 넓이의 이곳에는 기와 몇 점이 흩어져 있고 암벽에는 쇠말뚝 흔적이 남아 있다. 최근에 어떤 분의 증언이 있었는데, 이 곳 쇳가루 시료를 전문가에게 보내서 몇 년이나 됐는지 알아봤는데 몇 백 년은 됐을 것이라는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진표 당시의 쇳가루는 아니라는 사실에서 진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수도처로 삼았다는 얘기다.
  부사의방을 답사할 때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그 중 하나는 ‘망한 나라의 신앙지도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을 미혹했다. 그저 현실을 잊고 죽음 뒤의 세계나 얻기 위해 살라고 했다면 일본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종교인들의 별다른 노력 없이 찾아온 해방을 신의 뜻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해버리는 것 또한 백제 사람 진표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다람쥐 절터라 부르는 부사의방은 신비스러운 얘기를 품은 채 대화 상대자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역사의 신이 있다면 부사의방에서 던졌던 인간들의 화두는 결코 과거일로 맺은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하면서.

정재철
(사) 부안이야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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