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초상화

교산자 허균은 선구적으로 그의 시대를 앞서서 숨막히는 봉건적인 체제인 조선중기를 살은 400년 전의 참으로 비범했던 시인과 혁명적 인간이었다. 그런 허균의 지상과 현실에서의 삶은 본질적으로 부자유스러워서 마땅히 그가 뒤바꾸고저 했던 세계였다. 그는 파란만장의 영욕이 교차되던 세속적 지상의 삶의 저 편에서 무간지옥 같은 불교의 진리를 좋아하며 심지어 한 때 생각으로나마 중이 되기를 원하고 또한 실제로 참선을 즐기기도 했다.
이런 그가 노장의 신선처럼 자연 선계의 이상향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했던 곳이 우반동 선계계곡의 절벽 위에 세웠다던 정사암(靜思菴) 그의 거처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길지 않게 머물면서 그는, 부안이 나은 천재적 여류시인 매창과 더불어 행복했던 그녀와의 십년 세월의 깊은 영혼의 교감을 나누면서 지상에서의 선객의 삶을 약속하고 꿈꾸기도 했었다. 아울러서 그는 이곳에서 그의 분신과도 같은 홍길동전을 집필하면서 계급과 신분차별이 없는 율도국의 유토피아를 형상화하였다.
불교에서는 현실의 차안과 현실을 초월한 피안을 말한다. 젊은 날 승려이기도 했던 시인 고은이 그의 시집 ‘피안감성’을 편적이 있지만 불교에는 바라밀 저 건너 강 너머 도피안에 이르는 수행과 깨달음의 중요성이 진리로 설파된다. 독일어로 이상향 유토피아는 Irgendwo 이다. 어딘가에는 있는 이상적인 인간의 땅이다. 그런데 비슷하게 Nirgendwo는 아무 곳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Ir와 Nir의 글자 하나 차이로 이 같은 엄청난 괴리가 가능한 것이다. 혁명과 사랑은 지상의 어딘가에는 분명히 실현가능한 인간의 삶의 자리이며 이상향,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이상과 신념과 꿈을 꾸고 싸우는 혁명가와 삶에서 본질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시인에게 있어 때로는 지상의 삶은 참으로 그의 삶을 비극적으로 저당 잡히거나 희생하여야만 하는 슬픈 운명일 수도 있다.

허균 처형 직전, 외손에게 주어 남겨진 성소부부고

 한 역사적 공간과 지역은 굳이 그곳이 고향이 아닌 타향일지라도 그 곳에서의 삶의 일상성을 뛰어넘어 가장 치열하게 혹은 진실되고 불꽃처럼 살은 이들의 의미가 크다. 허균의 사상과 영혼의 평화와 시가 머문 곳, 그리고 그의 또 하나의 소설적 형상과 전형으로서의 최초의 민중적 소설 홍길동을 저술한 곳으로 우반동은 그 의미가 너무도 크다. 허균은 조선에서 가장 혁명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비범한 자질로 일찍 장원급제를 하며 벼슬을 하였지만 그의 대쪽 같고 강직한 품성과 더불어 혁명적이고 자유로운 성정과 굽힘 없는 삶의 태도로 인하여 무려 5번이나 파직을 당하는 굴절의 삶을 살았다. 수안군수 시절에는 허균이 불교를 숭배한다고, 공주부사는 가난한 친구들을 돕는다고 파직을 당하였다. 그런 굴곡과 영욕이 교차되는 허균의 삶에서 가장 위로와 행복을 느낀 곳이 호남이었고 특히 부안 우반동이었다. 그는 1601년에 충청 전라지역의 세금을 징수하는 전운판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그의 나이 30세에 부안과 우반동을 방문한다. 당시에 그의 장형 허성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허균은 결국 1618년 10월 12일(음력8월24일) 불과 49세라는 그의 나이로 불꽃처럼 피워냈던 삶을 마감한다. 만고의 역적 허균의 죄목으로 능지처참이라는 사지를 절단하고 저자거리에 효수되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대로 추국과 처형 직전까지 당시 형조판서이던 허균의 집은 무너뜨리고 역도의 집의 흔적을 없애는 뜻으로 그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형체도 찾을 수 없는 참혹한 종말을 맞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그가 정성들여서 만들었던 부안 우반동 선계안골에 위치하던 아름다운 절벽 위의 정사암 4간 집도 폐허로 만들었을 것이다.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받을 때 그의 신체에 무려 3천 번의 회질이 가해지고 사지가 찢겨지고 결국 목이 잘리는 허균에 대한 참혹한 형벌은 그가 어쩌면 조선왕조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가장 타기시하는 혁명적 사상과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그는 호랑이같이 성나면 무서운 민중을 호민으로 설파하며 맹자의 천명사상과 역성혁명과 통하고 버금가는 새로운 사상을 주장했다.

허균이 남긴 짧은 서한 필적

부안의 우반동은 원래 정감록에서도 조선에 있어서 유명한 십대승지에 속하는 곳이었다. 현재 우반동은 원래의 모습보다는 큰 길이 나고 저수지를 만들면서 원래의 그 수려한 모습이 상당히 훼손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반동은 찬찬히 살펴보면 예전의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승지의 그윽함과 빼어난 자연 풍광을 아직도 뚜렷이 지니고 있는 편이다. 우반동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는 청림리에 이르는 내변산 쪽은 가히 큰 도둑떼들도 은거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을 잃을 만큼의 내밀한 또 하나의 깊은 세계이다. 실제로 가로와 세로 모두 80리에 달하는 반도 변산은 한 때는 해적의 소굴과 웅거지였다고도 한다.

자연조건과 풍경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곳에 걸출한 인물과 사상이 깃들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공허할 수도 있는데 반하여, 부안의 우반동은 우리의 역사에서 한 사람도 아닌, 참으로 빼어난 세 사람의 인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전설의 땅이 되어버렸다. 그 세 사람은 교산 허균과 반계 유형원과 연암 박지원이다. 참으로 철학과 인문학적 경륜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유지들이라면 이 우반동은 근자에 회자된 단순한 실학박물관의 차원을 넘어서 참으로 차원 높은 한국사상의 유토피아의 발원지의 자리매김과 전당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뜻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허균과 유형원은 넓지도 않은 부안 땅 변산반도의 우반동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다소의 시간적 차이는 있었지만 그 공간을 비슷하게 공유하면서 살면서 그들의 혁명적 혹은 개혁적인 꿈과 뜻을 지니면서 저술을 하였다.

대역죄인의 사지를 쳐서 죽이던 극형, 청대(淸代)의 능지처사(陵遲處死)

허균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행복하게 우반동 계곡에서 정사암을 짓고 약간의 노비와 함께 그의 전장을 일구었다. 그가 얼마나 우반동의 자연과 풍광을 사랑했는지는 그의 <성소부부고>와 <우반동 산월헌기>에 너무도 아름답게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또한 그는 우반동 선계계곡 위에 원래는 부안 김씨가 만든 정사암의 낡은 건물을 인수하여 새로 만들면서 <정사암중수기>를 통하여 그 정사암에서의 저술과 자연적 삶을 매우 간절하게 희구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허균은 오래 그곳에 머물며 살려던 원래의 뜻과 계획을 제대로 실현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유형원은 사실상 그가 진사로 급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부름에도 전혀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우반동을 중심으로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의 개혁의 꿈과 사상을 담은 반계수록을 완성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연암 박지원은 이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우반동을 무대로 그의 소설작품을 구상하고 쓴 인물이었다.
시기적으로 세 인물 중에서 가장 먼저 우반동을 찾아 온 인물은 교산 허균이었다.
조선의 명문가 양천 허씨 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총명과 문장과 지성의 소유자이던 허균은 불행하게도그의 천재적인 자질로 말미암아 세속과 시대와 불화하면서 그가 포지했던 혁명적 사상과 불행한 이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으로 인하여 결국은 역모로 몰려서 참혹한 능지처참형을 받고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마감한다. 그런데 사실상 허균은 천재였으며 그의 면모는 봉건질서에 항거하고 맞서려던 당대의 혁명사상가이자 빼어난 시인적 자질과 풍부한 인간애와 감성을 지닌 가히 전 조선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던 르네상스적이며 전인적 존재였다. 심지어 허균이 함열 땅에서 유배를 당할 때에 그는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는 조선 8도의 음식들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조선시대 전체를 걸쳐서 매우 희귀한 음식에 대한 글을 써서 책으로 엮었다. 그는 니이체적으로 매우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무덤도 시신도 없는 혁명아 허균의 문중 가묘

그는 단순하게 시대와 불화한 과격한 혁명가적인 면모의 인물만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비범한 기억력에다 엄청난 독서광에 가까운 왕성한 지적탐구력과 함께 그가 원래 공부했던 주자학의 유교적 바탕 위에 불교적 세계관과 도교의 신선사상까지도 섭렵하던 지성인이었다. 그의 장서량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허균의 인간적 자질은 그가 지닌 당시의 가장 빼어난 조선사회의 지배계급의 최상급의 금수저에 속하는 상층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봉건적 주자학적이며 신분적인 질서와 제도 속에서 언제나 그는 민중과 서얼출신 및 천인들과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가장 비주류들에 향한 그의 사상과 애정과 인간관계들이 뜨겁고 깊었다. 그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그 자신 안정된 체제유지의 톱니바퀴와 기득권에서 이탈하여 끊임없는 좌절과 굴절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고 경험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여립에 이어서 봉건적인 조선왕조 체제에서 그 낡은 이념과 신분적 제도적 굴레를 혁파하고 조롱에 갇히운 새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비상하는 새로운 날을 선구적으로 꿈꾼 천생의 시인과 혁명적 삶을 유감없이 살다가 운명처럼 시대와 역사의 희생양 -스케잎 고우트가 된 것이었다.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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