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창간 13주년을 맞아 ‘부안민중사’를 정리하는 대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부안은 동학농민혁명부터 가깝게는 핵폐기장 반대투쟁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그 흐름을 바꿔놓곤 했던 ‘민중의 땅’입니다. 군민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부안독립신문은 이 땅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부안 민중의 존엄과 자주성을 드높이고 계승하고자 이번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연재는 이번 호 ‘서설’을 시작으로 약 1년 동안 40~50회 가량 진행될 예정입니다. 집필은 최근 부안에 터를 잡은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종교사회학 박사인 최자웅 신부께서 기꺼이 맡아 주셨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랍니다.  / 편집자 말

 

1. 서설

한 알의 씨알이 백배, 천배의 결실을 이룰 수 있고, 한 점의 작은 불꽃이 온 광야를 태울 수 있다. 딜타이의 말처럼 삶은 타오르는 불꽃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이 불꽃의 에너지와 아름다움과 열정이 필요하고 우리라고 하는 집단에서도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의지와 에너지와 사건의 불꽃도 매우 의미 있고 필요한 것이다. 때로는 크고 긴 호흡에서 볼 때는 물론 찰나적인 것도 있지만, 상당히 오래 아니면 장구한 시간의 단계와 차원에서 흐르는 유장한 불꽃과 강물의 흐름들이 가능할 수 있다. 또한 마땅히 가능해야만 하는 불꽃들이 있다. 그리고 행여 숭고하고 아름다운 삶과 불꽃이었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진 존재들이 있다면 그를 발굴하고 조명하고 우리에게 살아있는 뜻과 인물과 역사로 생생히 복원시키고 부활시켜야할 엄숙한 과제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문학과 역사의 본질이며 과제라고 시인이며 학자로서의 나는 분명히 생각한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그리고 우리들 무수한 개인들이 모여 우리로 살아가는 집단적 삶과 역사에서도 그 역사적 현실과 사건이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아울러서 그 삶과 역사를 언어로 엮고 기술하는 것도 매우 자신의 살아있는 존재성을 위해서 참으로 긴요한 일이고 과제일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한 영국의 역사가 E.H. 카의 명제는 지극히 옳은 것이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과거의 성찰과 탐구가 진실하고 엄정하게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 거울에서 미래라는 바른 희망과 창조와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혁명을 이룬 모택동 또한 그의 이론적 탐구 및 혁명적 실천과 무장투쟁 못지않게, 중국의 전통적 역사의 집대성 자료인 '자치통감'을 항상 학습하고 거울로 삼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부안민중사의 또 다른 시금석이다.

이번에 소중한 가연으로 인해서 부족한 필자가 부안독립신문의 초대로 인하여 귀한 지면에서 부안민중사의 큰 흐름을 엮게 되었다. 부안은 한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생거부안으로도 유명하거니와 또한 우리의 역사에서, 특별히 근대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생동하는 민중의 역사의 차원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과 인물과 뜻에서 그 의미가 너무도 심대하다.
필자가 독일 유학시절에 느낀 바가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에서도 독일역사학에서의 새로운 흐름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서술이 주로 왕이나 귀족 등의 통치자와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했던 역사에서 통전적인 역사의 사실상 주체인 민중사로의 흐름의 변화와 함께 그 민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갔느냐 하는 '일상사'가 강조되고 서술되던 것이었다.
오늘, 우리 부안의 민중사의 차원에서 그간에 나름대로 부안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적 역사를 살아온 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에 대한 수많은 의미있는 나름대로의 기술들이 있었겠지만 오늘 독립신문에서 '부안민중사'의 탐구라는 시각에서 그 수많은 사건과 인물과 역사를 통관하고 종횡으로 자유롭게 교직하면서 뜻으로 일관되게 그 오늘의 깊은 의미를 탐구 추구해보는 것은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부안 민중사라는 시각에서 앞으로 40-50여회 정도의 장기적인 흐름과 안목에서 고대와 중세까지는 어려워도 적어도 근대라고 하는 뜻으로 보면 최근세와 현재를 상당히 많이 제약하고 운명 지우는데 상당한 의미를 부정할 수 없는 시점과 사건과 인물에서부터 부안민중사는 시작하려 한다.
필자가 보는 부안민중사의 본격적인 시점은 '우반동'의 상징성이다. 그 각론적인 구체성은 다음 순서에서 다루어보려 한다. 부안 변산반도의 줄포만에 있는 우반동이라는 작은 공간은 두 인물의 정신성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부안민중사의 시금석이다. 아니 이 의미는 부안의 지역성을 훌쩍 뛰어넘는 전체 당시 조선과 봉건적 시대에서도 그 파장이 큰 것이었다. 그 두 인물은 교산자 허균이고 반계 유형원이다.

허균은 그의 삶과 뜻의 다이나믹한 혁명성으로 인해서 삶에서 굴절이 유난히 많았던 파란만장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허균이 가장 영욕이 교차되는 극적인 롤라코스트의 삶을 살면서도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해했던 시간과 공간이 부안이었다. 부안에는 혁명아 허균을 아끼는 현감도 벗들도 있었고, 또한 비록 기생의 신분이지만 허균의 불우하고 비극적인 누이 허난설헌에 못지않은 천재적인 시적 자질을 갖춘 매창이라는 빼어난 존재가 있었고 두사람은 깊은 우정 이상의 교분을 나누었다.  허균은 그가 저술한 소설 홍길동전에서 보이는 바처럼 한국의 유토피아와 같은 율도국을 꿈꾸고 모든 봉건적인 신분제의 구속과 운명을 깨뜨리는 그런 세상을 혁명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런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공간이 우반동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은 풍광이 수려한 강원도 강릉 출생이지만, 대관령 너머 그의 고향의 풍정 못지않은 부안의 변산반도와 특히 줄포만을 낀 우반동의 아름다움에 너무도 마음을 빼앗겨서 그의 삶의 거처를 우반동에서 이루려고 작심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었다.
허균의 뒤를 이어, 또 한 인물이 우반동을 찾아 그의 이십년의 성상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반계 유형원이다. 그는 아버지가 사화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조부의 간절한 비원에도 불구하고 진사급제로 자신의 입신양명 과거를 기꺼이 단념한다. 그리고 원래 한양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지만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조상의 사패지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연고로 그의 장년의 삶 20년을 우반동 계곡에서 다시 꾸리게 된다. 그의 학문연구와 경세적 탐구는 노작 '반계수록'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주고 가치가 평가되어 진다. 유형원은 호남실학의 비조가 되고 후세에 많은 실학학자들과 특별히 다산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당시 봉전적인 조선에서의 절대다수의 민중은 농민이었다. 그런 민중 즉 농민에게 경자유전을 주장하고 병농일치와 수많은 전반적인 국가경영의 개혁의 꿈을 그는 지니면서 우반동에서 경세의 이론을 탐구하고 아쉽게도 그 포부도 이루지 못하고 50대 초반의 나이로 죽어갔다.

이러한 선각자들의 치열했던 꿈과 삶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이나 지배계급들이 진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민중을 아끼지 못했기에 조선은 수많은 왜란 호란을 거쳐 통치계급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기에 결국 왕조의 멸망에 이르렀다. 일개 통치계급과 왕조의 멸망의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민족 전체가 노예와 식민지가 되는 참담한 역사적 비극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멸망에 앞서서 전 민중의 삶과 정신과 의지의 불꽃이 마치 활화산처럼 장엄하게 터져 나왔던 것이 바로 1894년 갑오년동학농민혁명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터져 나왔는가? 바로 그곳이 우리의 땅 부안이었던 것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지도로 고부의 현감 조병갑의 탐학 수탈에 맞서서 항쟁하고 조선천지를 개벽의 역사의 새벽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 고부의 만석보 사건이었으며 이의 항쟁을 통하여 전봉준 장군과 민중들은 만약에 부패 무능했던 당시의 조선의 지배계급들이 비참하게 구걸처럼 일본과 청국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으로서 새로운 근대의 새벽을 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같이 매우 중요한 한국민중운동과 역사의 획기적 계기가 되었던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와 발상지가 고부 땅이었고 이 곳 부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전체 부안사회에서 동학혁명에 대한 관심이나 선양은 물론 그 정신과 가치를 부안과 군민의 삶에서 기리고 생동하는 우리의 에너지와 삶과 가치로 꽃피우려는 노력은 과연 어떠한가? 이같은 관심과 노력들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다른 정읍이나 고창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안의 관계(官界)나 부안의 평범한 민중들과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상당히 아쉽고 엷게 느끼는 것은 잘못된 기우이며 시작일지 모르겠다. 부안민중사에서는 필자 나름대로 이러한 진한 아쉬움을 안고서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장군을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혁명은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강산과 전국을 뒤흔들며 엄청난 민중의 호응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조정과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힘과 군대로서는 도저히 동학군을 이기고 상대할 수 없게 되자, 상전인 청국에게 병력파병을 요구하게 되고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일본에게 좋은 구실을 주어 일본군의 압도적인 총과 무기 앞에서 수십만의 동학혁명군이 도륙당하고 패배하면서 결국 급속하게 조선은 패망과 일본제국주의의 노예의 운명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의병활동에 떨쳐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일본군대와 처절하게 싸운다. 새삼 놀라운 것은 부안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지도자와 의병활동이 특별히 변산 일대에서도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처형당하고 체포되는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대의 무기 앞에서 이마저 수포로 돌아간 이후에 완전히 독립을 상실한 조선 땅에서 나라를 찾기 위하여, 또한 새로운 이념과 흐름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그 역동적인 노력과 싸움이 처절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과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부안이 낳은 한국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대표적 지도적 인물인 지운 김철수의 존재와 치열한 투쟁경력과 사심 없는 삶은 참으로 빛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이 비극적인 분단이념의 반 쪼가리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실 때에, 피를 나눈 혈육은 비록 아니었을지라도 마치 부모님을 섬기듯이 극진하게 모시고 봉양하였던 분이 백산중학의 설립자인 정진석 전 교장이다. 그 자신의 삶이 신산한 것이었고 그 주변의 분단의 희생자들과 장기수들도 같았던 그들의 아픔과 꿈을 우리 부안민중사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생한 그들의 삶과 역사의 궤적을 확인하고 더듬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우리 부안에는 조금은 상대적으로 화려했던 문학적 찬탄과 칭송의 대상이었던 서정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소소했을지라도 시인의 본질과 지성인의 역사적 삶으로서는 가히 친일행각과 그 뒤를 이은 권력에 어용적으로 약하고 비굴한 처신과 문학을 보인 미당과는 전혀 그 본질과 위상이 다른 신석정이라는 거목의 시인이 있다. 신석정의 삶과 시는 언제나 식민지의 우리 민중의 전형적인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마치 빙하와 대바람 소리처럼 한번도 굴절되지 아니하고, 그리고 영원한 산의 서곡처럼 장엄하였다. 심지어 신석정 시인은 해방공간과 6.25 전쟁 전후에 극심한 고통을 당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전라도는 항상 정여립의 모반사건 이래 반역향으로 소외되었고 특히 동학혁명의 후폭풍은 거대한 상채기를 남겼다. 더구나 일제하에 일본제국주의는 비옥한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특별한 수탈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이승만의 정권에서는 전형적인 야당지역이 전라도였고, 그것은 그 후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의 신군부 독재정권을 통해서 계속 영남패권의 신화와 더불어 전라도는 언제나 소외된 땅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연히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이 전라도와 부안에서도 가열차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70-80년대의 민주화를 위한 학생 청년 민중운동에 있어서 귀한 인물들과 노력들과 희생들이 이어졌다.
일찍이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빼어난 천재로 그 이름을 떨치던, 고 김근태가 주도하던 민주화청년연합의 최고의 이론가이자 브레인이 부안출신의 이을호였다. 그리고 이을호는 철권군부통치의 폭력적인 야수성 속에서 참으로 애석하게도 가장 희생적이고 고통스러운 값을 개인사적으로 치루어야만 했다.
이 흐름 속에는 일찍이 어린 고교생의 신분으로 조숙하게 민주화의 투쟁에 몸을 던진 부안의 아들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그들의 특권의 삶을 포기하고, 민중의 아들로서 일개 노동자로서, 일개 평범한 농부로서 살고저 작정하고 공장으로, 농촌의 현장으로 투신한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의 현대판 브나드로의 주인공들이 있었다. 이들의 투신과 열정과 실천적 삶도 재조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름도 빛도 없이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민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그 자랑스럽고 고귀한 흐름 속에서 부안은 정치적인 정략과 전략과 셈법으로도 창안된 소위 거대국책사업 새만금개발에 맞서서 온전히 이 땅의 순결과 생태평화운동을 줄기차게 추구했던 그 노력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부안방패장유치 반대의 거대한 군민들의 투쟁과 노력이 이어졌다. 찬반을 넘어서 그를 다시 미래적으로 필요한 부안의 건강한 시민운동의 개화와 통일복지시대의 새로운 거버넌스의 차원에서 재조명하고 새기는 것도 오늘과 미래를 위하여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안에는 변산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벌써 이십년에 가까운 농부철학자인 윤구병 전 교수와 그의 동지들에 의하여 조성된 소중한 공동체가 있다. 교육이 황폐화되고 참된 인간양성의 길이 어려운 이 시대에 부안에서 소중히 그 뜻과 귀한 존재와 명맥을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는 변산공동체가 있음은 부안의 자산이며 자랑임에 틀림없다. 농사에 인농(人農)- 사람 농사처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부안민중사는 동학의 위대한 진리와 가르침처럼 사람인 하늘인 인내천(人乃天)인 세상과 그 개벽을 위하여, 인간이 하늘이 아닌, 인간이 벌레만도 못하고 짐승만도 못한 인내천(人乃賤)을 극복하는 우리들의 크고 작은 몸짓도 재조명하고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포와 가치를 위하여 필자는 굳이 과거의 전형적인 좌우의 이념편향적인 분류를 뛰어넘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통전적 시각으로 부안민중사를 추구해보려 한다.
역사적 진실, 사실과 실체로서 마땅히 소외되고 매장된 부분을 재조명하는 일은 필연적인 일이겠지만 가능하면 따뜻한 진보와 건강한 보수까지도 아우르려 노력해볼 것이다. 부안독립신문과 필자의 이같은 귀한 뜻을 이해하시고 독자제현께서는 아낌없는 질정과 아울러 따뜻한 마음의 성원과 함께 귀한 숨겨진 자료와 소재발굴에 적극 협력하여 주실 것을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 성공회 사제로 젊은날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하며 노동사목을 시도함. 인천, 춘천 나눔의 집 원장과 서울, 춘천, 강화에서 사목.

* 성공회대학교 강사. 전국기독교빈민선교협의회부회장.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부회장. 민족화해연 부의장. 참여연대 운영위원. 한국시니어클럽협회장. 한국시니어주니어노동연합 의장. 노년유니온 상임위원장. 한국작가회의 회원. 전북작가회의 회원.

* 박사논문 : 마오이즘과 손문주의의 인간이해 연구ㅡ중국혁명기, 연속선과 차이를 중심으로
저서 : 마틴 루터 킹. 마더 데레사 생애.
시집 : 1983 그대여 이 슬프고 어두운 예토에서. 1990 겨울늑대 ㅡ어네스토 체 게바라의 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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