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당선 후에는 공론화 위원회를 만들고 여기서 중단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변경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의 공약이니 즉각 5,6호기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핵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모인 위원회 - 공론화위원회에는 8명의 위원이 있는데 김지형 전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여 화학공학, 통계, 도시사회학, 갈등관리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민참여단의 학습과 토론과정을 거쳐 정부에 최종의견을 제시한다 - 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필자는 빠르게 탈핵이 이루어져야 입장이지만 공론화위원회는 반가운 마음으로 환영할 수 있었다. 공론화위원회라는,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낯선 정책결정 방식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과정을 민주주의라는 단어와 동일시 해왔다. 또 다수결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걸 민주주의라고 여겨왔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있고,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수결’과 ‘투표’, 이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하는 현재의 대의민주주의는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그 중에 한가지로 이야기 되는 것이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다. 숙의민주주의에서 법과 정책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를 통한 다수결의 획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 그대로 신중한 토론인 ‘숙의’과정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합의적(consensus) 의사결정과정을 다수결 원리만큼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할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토론이 중요한데,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심도 깊은 정보를 제공받아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만든다. 정치 선진국의 경험을 보면, 숙의민주주의는 여러 이점이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결정을 내리기 쉽고, 반대 입장에 대한 적대심을 줄여주며, 정책에 대해 보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 다수와 소수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합의를 도출해 낼 가능성이 높아지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회적인 유대감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탈핵이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필자는 크게 두 가지 의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첫째, 대통령의 공약은 정권이 바뀌면 다시 뒤집히기 쉽지만 숙의민주주의나 국민투표에 의한 결정은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탈핵 과정은 아무리 빠르게 진행된다 하더라고 1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5년 혹은 10년 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다시 핵발전소가 늘어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중요한 정책이 소수의 정치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들의 숙의과정으로 결정된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다.

하지만 현재 공론화위원회의 운영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암울한 생각마저 든다. 9월 13일,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은 "현재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이렇게는 안 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공론화위원회 활동에 협조를 하지 않고 있다. 공론화위원회가 합의된 토론 자료집 구성 원칙을 뒤집고, 자료집 도입부를 한국수력원자력의 논리로 작성하고, 시민행동이 작성한 토론 자료집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라는 등의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인기투표도, 찬핵과 탈핵이 선악대결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시민참여와 숙의를 통해 우리사회 에너지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다. 그런 막중한 역할을 맡은 공론화위원회가 시민들의 숙의를 진행할 준비와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참여단 오리엔테이션에서 준비부족을 사과하고, 시민행동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선해야 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시민참여를 통해 에너지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거대한 사회적 실험이다. 이번 공론화의 경험이 향후 탈핵과 에너지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공론화 과정은 제대로 된 숙의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현재 문제를 꼬고 있는 정부와 정치권, 공론화 위원회가 책임을 지고, 공론화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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