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사, 업무, 물건이나 돈이 오고가는 만남은 편하다. 순서대로 척척 이루어진다. 그런데 20분이나 30분 쯤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말이 술술 이어지면 좋겠지만 어느 순간 찾아오는 침묵. 참 불편하다. 이때 나는 모델이고 상대방이 화가라면? 옴짝달싹 못하는 생고문이 아니라 상대방 앞에 앉아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면 침묵도 꽤나 유용하다.
마주드로잉. 이춘섭(63)씨가 이름을 붙였다. 사람을 만나면서 잠깐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알고 싶거나 친해지고 싶은 상대가 있을 때 이춘섭씨가 쓰는 수법(?)이다.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누군가 내 얼굴을 오래 살펴본다면 불안하거나 불쾌한 일. 뭐가 묻었나? 오해도 살만 하다. 그래서 대부분 눈을 마주하거나 시선을 떨구는 것이 예의다. 더구나 스마트폰을 통한 만남이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예쁜 이미지 파일이 아닌 상대방의 ‘쌩얼’을 가만히 볼 기회가 없다.
이춘섭씨의 마주드로잉은 상대방의 얼굴을 맘껏 바라본다. 그 사람이 보인다. 아픔이나 외로움, 그 사람이 지나온 고된 길이 보인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이춘섭씨의 얼굴을 보며 한 걸음 더 이춘섭씨에게 다가온다. 서로의 마음이 마주한다.
이춘섭씨가 처음 마주드로잉을 했던 것은 4년 전이다. 어르신 한분의 활동적인 노년의 삶을 전해 듣고 그 분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며 그림을 그렸는데 좋았다. 서로를 안다는 것, 그 결과물인 그림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 그때 느꼈다.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후 이춘섭씨는 많은 사람들을 그렸다. 가족, 직장 동료나 주변 사람들을 그렸다.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분이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분들도 기사를 읽고 그렸다. 마주드로잉은 이춘섭씨에게 누군가의 삶에 대한 공감이나 존중의 방법이다.
이춘섭씨는 더러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림을 받고 환하게 웃는 것을 볼 때 자신도 무언가를 얻는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잘 그렸든 못 그렸든 자신을 그려준다는 것에 존중 받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춘섭씨는 그렇게 믿는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있어야 마주드로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말 외의 또 다른 언어가 있거든요.” 꼭 말이 아니더라도 전해지는 친밀감 같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춘섭씨는 가족 외에 사람과 만나는 일은 누구나 어렵다고 말한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욱 그렇다면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말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적당한 관계. 이춘섭씨에게 마주드로잉은 그런 관계 맺기라고 설명한다.
이춘섭씨는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도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야 건강한 관계 맺기도 가능하다.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 못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외로움, 상처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하고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춘섭씨도 그런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을까? 망가지고 싶을 때.
“그럴 때는 기도나 명상을 통해 망가져요. 이 나이에 밖에서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외로움, 고독 이런 것들을 살펴보면 상처 입은 내가 있거든요. 이런 것을 살피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 성숙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탁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이춘섭씨는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눌 것이다. 이춘섭씨는 오늘도 마주드로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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