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밤마다 퇴근을 촛불집회장으로 했다. 골목골목마다 까맣게 중무장 한 전경들이 떼로 막아선 그 곳을 뚫고 지나갔다. 헬멧이 어둠 속에서도 번쩍번쩍 빛이 났다.
작년 11월 17, 19일 싸움 때 보았던 간담 서늘한 느낌이 그대로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곤두선 곤봉이 또한번 내 마음을 내리쳤고, 날이 선 방패가 또다시 아픈 마음을 자극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오롯이 감싸안고 쫓기듯 집회장으로 향하는 우리의 두 손엔 핵폐기장 보따리가 어김없이 들려있다. 아스팔트가 너무도 차가워 스스로 집에서 제작한 스티로폼 방석과 쓰다만 양초 토막이 10여개 남짓 들어있고, 찌그러진 종이컵, 짝짝이, 시린 무릎을 덮을 헌 담요, 두어 개 남짓 되는 핵폐기장 결사반대 빨간 머리띠... 이 모든 게 2-3시간 동안 요긴하게 쓰일 소중한 내 물건들이다.
우린 생선가게 할머니 복장(추위 때문에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서 뚱뚱해진 모습)들을 하고서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채 반핵 민주광장을 지켰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루어낸 촛불집회는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짠 대책위의 팀들이 한 몫을 톡톡히 해 낸 셈이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극이며 노래, 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우리 부안 주민을 이끈 것 같다.
사회자의 구수한 입담. 잘못된 군수를 호통 치는 자유발언과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춤과 노래. 어디서 이런 즉흥공연을 볼 수 있을까. 이 코너에서 가장 크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내가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대리만족 같은 것일 것이다.
우린 백지화를 이룬다 하여도 정기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유지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느 할머니는 저녁마다 TV에서 하는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다고 하신다.
반핵 광장 옆에 묻었던 타임캡슐 항아리 안에는 1년 동안 내 시린 무릎을 감싸주었던 헌 담요가 같이 호흡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그 뚜껑을 열었을 때 얼마만큼의 감동을 줄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작년 추석 전날, 제사음식을 하다말고 반핵 플래카드를 뗀다는 연락을 받고 슬리퍼를 신은 채 나갔다. 새까맣게 전경들을 앞세우고 거리거리마다 걸린 반핵 현수막을 낫으로 잘라갈 때 그 낫은 내 마음을 갈갈이 찢었다.
떼어 가면 또 걸고, 떼어 가면 또 걸기를 수십 차례. 그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막칠하세팀이 꾸려져 길거리 벽마다 노란 물을 들이고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고, 거기서 또 한번의 위안을 얻었다. 우리 군민들의 번뜩이는 재치에 또 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올 봄엔 노란 반핵티를 입혀 만든 허수아비 두 개를 논 가운데에 세워 놓았다. 반핵깃발을 장대에 높이 달아 그 걸 붙잡고 있는 허수아비가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침 출근 때마다 초록빛 들판에 우뚝 서서 핵으로부터 당당하게 우리 쌀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를 볼 때마다 한없는 위안이 느껴지곤 했다.
수배된 남편이 1년 넘도록 집에 오지 못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안정되지 못한 생활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어머님은 수배된 아들이 하루빨리 그리운 가족 품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새벽마다 108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올리셨다.
그 덕분인가. 아이들은 이제는 죄 아닌 죄 값(?)을 톡톡히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를 보고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너무도 많이 아파 버린 우리 군민들. 그 상처는 언제나 치료가 될지. 얼마만큼 서로 끌어안고 용서해야 할지 큰 숙제로 남는다.

박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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