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나락들은 빈 쭉정이가 태반...수입쌀때문에 가격마저 폭락하고

계절이라는 것도 다 사람 마음의 실정(實情)만큼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여름 한철 장마, 더위와 내내 씨름하다가 문득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막혔던 가슴마저 뚫리곤 했다. 그러나 올해는 엄청난 수해와 잦은 장마 때문인지 들판을 지나면서 바라보는 푸르고 넓은 하늘이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결실(結實)의 부족에서 연유함이 아닌가 한다.

지난 수해도 수해려니와 이상기후 탓인지 하루가 멀다하고 내리는 비 때문에 올해도 일조량 부족으로 들판 나락들의 잎은 반쯤 말라가고 열매도 빈 쭉정이가 태반이다. 거기에다 쌀값마저 떨어지니 누런 들녘의 배부름은 사라지고 느느니 한숨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들판 사이를 걷다가 언뜻 바라본 하늘이 아찔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조금 적자가 나더라도 그런대로 결실의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금년에는 축복이어야 할 이 계절이 소출의 부족과 수입쌀로 인한 가격폭락으로 시름만 느껴진다. 도대체 저 긴긴 겨울을 무슨 낙으로 보낼 것인가? 사실 내 호구도 농부들의 호주머니와 무관하지 않지만, 그러한 농민들의 현실로부터 오는 고통은 건강한 삶의 가장 큰 적이다.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과도한 육체적 노동에다 심리적인 압박감은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인 것이다.

지난 명절 때 오고가는 차들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외부와 소통되는 다리와 도로만 막아버릴 수 있다면, 허리 굽고 주름진 늙은 농부는 손자들의 재롱과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즐겁게 살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삶을 앗아간 것일까?

시골의 농부는 힘들여 낳은 자식들을 키워서 기업의 충실한 노동자를 만들었고, 이 나라는 쌀을 포기하고 대신 핸드폰을 수출했다. 그 사이 기업은 노동력의 착취와 국민의 혈세를 쏟아붓는 공적자금을 통해 지금 사상 유례가 없는 주가상승과 수 조원의 이익을 올리고 있다. 그 잘 나간다는 삼성도 자동차 사업을 정리하면서 수천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역시 세상은 그들만의 세상이란 말인가?

지금 이렇게 가진 자들은 번영의 세월을 누리고 있건만 죽겠다고 하는 농민들의 하소연은 그저 정치인들에게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나보다. 이미 세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더 이상 흡혈할 수 없을 만큼 다 늙어버린 시골은 안중에도 없다. 도시의 아파트가 10배까지 오를 때 부안의 아파트는 여전히 그 값이니, 서울의 돈과 농촌의 돈은 가치부터가 다르다. 상대적 빈곤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대입수능시험은 경제력에서 점수 차이가 나고, 또 지역성에서 차이가 나 시골은 이중의 손해를 보고 있다. 이런 마당에 누가 공부를 자신의 능력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떠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갈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다 갔다. 그리고 나도 언제 갈 지 모를 일이다. 또한 떠나는 이들을 더 이상 탓할 일도, 탓해서도 안 된다. 주거의 선택은 자유다. 다만 미련이 있는 사람, 깊은 애정이 있는 사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아서 뭔가를 해야 된다. 어떤 사회나 체제건 수혜를 받는 개인이나 집단이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내놓는 경우는 없다. 지금 시골과 농촌은 불평등 그 자체이다. 산업화정책 이후로 그것이 해결되기보다는 이농과 도시화로 문제 대상과 공간이 축소되어 조용해 보일뿐, 본질은 그렇지 않다. 계속해 심화되어 왔다. 그러므로 죽창을 들 것인지, 아니면 제도화된 참여공간에서 작지만 살 만한 세상을 만들 것인지는 남은 자들의 선택에 달렸다.

이제 핵문제는 과거의 교훈으로 남기고 반목과 질시를 떠나 구체적으로 한번 고민해보자. 벌써부터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온갖 유언비어와 험담이 오가고 있다. 새로운 부안을 만들어 가는데 가장 어려운 난관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구태적인 선거문화를 통해 이득을 챙기려 하는 자는 분명 낡은 세대여서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유언비어와 험담을 퍼뜨려 이익을 보려는 자, 그들이 오늘 우리의 앞길을 막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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