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면(舟山面)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조용하다. 이곳은 외부인들을 고향처럼 따뜻하게 감싼다. 지금이야 귀빠진 곳처럼 보이지만 옛 날에는 영원 · 고부 등 다른 지역에서 부안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네거리에서 내요리와 돌모산을 거쳐 덕림, 공작리, 모래뜸을 지나서 고부천의 가다리를 건너 영원역을 거쳐 고부읍내에 이른다. 또한 부안 남로(南路)의 중심 지역이었다. 부안읍의 객사에서 출발하는 남로는 남문인 취원루를 나서서 오리정 고개와 학당고개를 넘어 주산으로 접어든다. 보안면의 월천을 지나 아랫선돌 고개 넘어 줄포에 닿는다. 그러나 지금은 23번 국도가 상서와 줄포를 연결하면서 주산의 옛 길은 역할을 잃었다.
1980년대 중반에 주산면을 몇 차례 답사한 적이 있다. 주산에 사는 김인택과 이종일이 함께하면서 이들에게서 주산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들과 함께 간곳은 사산이라는 곳인데, 이곳에는 많은 자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새로운 도로를 내면서 이곳의 흙을 퍼가면서 옹기터와 자기터들이 파괴된 현장이었다.
사산리 옆의 뉘역메 산으로 들어갔다가 이엉을 두른 다음 용마름을 올려 지붕을 만들고 새끼줄로 고정시킨 초분(草墳)을 봤다. 상태로 봐선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분이었다. 초분과 풍장(風葬)은 차이가 있는데, 풍장은 사체를 지상이나 나무 위, 암반 등과 같은 자연 상태에 유기하여 비바람을 맞아 부패시켜 자연적으로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초분은 죽은 사람을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땅이나 돌축대, 또는 평상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서 몇 년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육탈(肉脫, 살이 썩음)이 되면 뼈만을 추려 다시 땅에 묻는다. 이러한 장법은 유교식 장례가 단 한 번의 매장으로 끝나는 데 비하여 두 번의 매장절차를 거치는 복장제(復葬制)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예부터 초분을 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극진한 예의였다고 한다. 곧바로 날송장을 산에 묻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고, 살과 물이 다 빠진 깨끗한 뼈로 산으로 가는 것이 조상에 대한 예의라고 봤다. 초분은 주로 서남해안의 섬 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주산에서는 80년대 중반에 발견됐으니 그 동기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초분을 쓰게 된 이유 등 의문이 컸지만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이 사진 한 장으로 그 때를 보여줄 뿐이다.
주산의 배멧산에는 백제시대 돌방무덤이 산에 가득하다. 이곳에 살던 이들은 어렸을 때 산을 뛰어다니면서 놀던 때를 기억한다. 돌방무덤 때문인지 발밑의 땅이 비어 있는 증거로 통통거리는 소리가 많이 났다고한다.
옛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주산을 기억하며 우선은 문화재 지표조사라도 하여 이곳의 문화재 분포라도 조사를 해야겠다. 주산에는 지역의 미래와 문화재의 회복을 고민하며 지금도 농민회 사무실에서 자주 얘기 나누는 농민회 여러분이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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